밤의 말을 새도 들을까
- 이상
- 진서
- 형사
- 김군
- 임군
- I
- 미려
중앙에 두 개의 철문이 있다.
문은 한쪽만 사용하며 쓰지 않는 문은 괘종시계로 막아 놓는다. (1장과 6장 제외)
1장뒷산
낮과 밤의 교차로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든다.
새들 찌르르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조명 IN.
분명 여기 어딘가에서 말을 봤는데.
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저기로 가야 하나?
길은 두 개인데 몸은 하나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어.
몸은 일로 가고 정신은 절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아니, 근데 그게 의미가 있나.
몸만 가면 기억을 못 할 텐데.
정신만 가면 움직이질 못하니 같은 장소만 계속 볼 테고.
I 입장.
누구세요?
어머, 꼬마야.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제가 먼저 질문했는데요.
당돌한 꼬마네.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나는 외계인이야. 지구 탐험 중에 길을 잃고 말았지.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줄래?
저는 새를 보고 있었어요.
새? 어떤 새? 비둘기? 참새? 아니면 까치?
아쉽지만 그 새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는 새는 없어. 너가 이름을 모르는 거겠지.
아뇨. 그 새는 정말 이름이 없어요. 저는 그 새와 함께 살아왔거든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그 새에 이름이 없다면 너가 지어주는 게 어때?
어쩌면 그게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르잖아.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그 새는 이름을 지어주려는 순간 제 눈앞에서 사라져요.
그 새의 이름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면
그 새가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죠.
이미 제가 찾던 새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가 되고 만 거예요.
굉장히 빠른 새인가 보네.
이 세상에 그 새만큼 빠른 건 없을 거예요.
나도 그 새를 한번 보고 싶어.
보실 수 있어요. 이 숲에선 그 새가 자주 보이거든요.
너는 이 숲에 대해 잘 알고 있니?
그럼요. 저는 이 근처에 살아요.
잘됐다. 혹시 이 근처에서 말을 본 적 있어?
누구나 쉽게 고라니라 말할 수 있는 불쌍한 말을 말이야.
그 말은 아마 저기로 가야 할 거예요.
저기 말하는 거니? 하지만 저기는 길이 없는데.
가다 보면 길이 나와요. 어쩌면 길이 생기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이 길들은 뭐야? 이 길로 가면 뭐가 나오지?
그 길로 가면 길이 나와요.
너도 잘 모르는구나.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 보면.
같은 말도 다 달라요. 같은 길도 다 다르고요.
이 길에는 빨간 새가 살고, 저 길에는 파란 새가 살거든요.
이거 참, 새에게 실례되는 말을 했네. 미안해.
누나는 친절하네요. 새에게 사과하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답례로 제가 새에 대한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요.
사실, 그 새는 늘 우리 곁에 있어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하고 있죠.
꽤 재미있는 상상이네.
그 새는 우리가 잊었던 것들을 전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새를 보고 있으면 문득 잊었던 게 생각나곤 해요.
그럼 너는 여기서 기억을 찾고 있었던 거네?
맞아요. 저는 기억을 찾고 있었어요.
어떤 기억인데?
말할 수 없어요. 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제 기억이 아니게 되거든요.
그건 좀 슬픈 상상이네.
어! 저기 새가 보여요.
어디?
암전.
아주 긴 사이. 새 소리는 안 나고 정적만 가득하다.
2장취조실
암전 상태에서 벽면 스크린에서 뉴스가 재생된다.
7천3백만 원대 사기 혐의로 입건된 17살 김 모 군이
어젯밤, 서울중앙지검에 송치됐습니다.
경찰은 김 모 군이 청소년 범죄조직 ‘I’로
활동한 것을 중심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공범 여부와 자금 흐름을 조사할 방침으로,
이번 수사를 통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날지...
스크린의 뉴스가 꺼지고 조명 IN.
이상과 김군이 조화가 꽂힌 꽃병 하나를 놔두고 나란히 앉아있다.
아저씨는 인생의 목표가 어떻게 되세요?
피고인은 공범이 있음을 인정합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내 주변엔 정말이지 아무도 없어요.
미성년자 혼자 해먹을 사이즈가 아닌 건 피고인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전 혼자서 라면 다섯 봉지도 먹어요.
거짓 진술인 게 밝혀지면 형량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아저씨, 여긴 밥 언제 줘요. 나 배고픈데.
피고인은 공범이 있음을 인정합니까?
인권 유린! 아동 학대! 인권 모독! 아동 사망!
피고인은 반성하는 법을 모르는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법 앞에선 자동으로 알게 되는 법이니까요.
나도 법 잘 알아요. 법이 헐면 헌법이 되잖아요. 근데 왜 안 헌법은 없어요?
사이
피고인의 아버지는 현재 청주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죠?
성폭행으로 이번이 두 번째고.
당신은 당신 아버지 같은 삶을 살 거예요.
교도소는 몸만 큰 어린애들이 살기 딱 좋은 곳이거든요.
꼭 제 미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전 아직 어른도 아닌데 말이에요.
제가 검사 생활 10년 하면서 내린,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뭔지 아십니까?
당신처럼 나이를 허투루 먹는 족속들은
하나같이 그 미래가 훤히 보인다는 거예요.
그것이 얼마나 명쾌한지 볼 때마다 졸음이 쏟아질 지경이죠.
제가 인생 17년 살면서 깨달은 건 그거네요.
검사님은 자기 경험이 세계의 진리라도 된 것처럼 구는 어른이다.
경험만큼 직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그때, 문을 열고 진서가 등장한다.
죄송합니다. 길이 좀 막혀서.
아니, 누나. 이 아저씨가 나한테 패드립 쳐요.
사실인가요?
사실 확인을 했을 뿐입니다. 뭐, 조서에 기재라도 할까요?
여전하시네요. 경우가 없으신 건. 언니랑은 잘 지내시죠?
사적인 발언은 자제해 주세요. 여긴 취조실입니다.
둘이 아는 사이에요? 완전 개꿀잼 몰카네.
조용히 하고 묻는 말에나 답하세요.
피고인은 공범의 존재를 //
(말을 끊으며) 검사님, 피고인 아니고 피의자입니다. 정정해주세요.
사이
변호사님. 알고 있겠지만 저는 제 말이 끊기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그리고 기소는 사실상 확정일 텐데요.
그럼에도 아직은 피의자 신분입니다.
또한 피의자는 공범 없음을 이미 몇 차례나 증언했고
공범 관련 증거도 전혀 발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속적인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경찰 쪽에서 흥미로운 자료를 보내줬습니다.
피고인이 사건 때마다 타고 내린 제네시스의 번호판이 모두 똑같더군요.
피고인은 늘 조수석에 타고 있었고 운전자 또한 똑같았던 걸로 추정되는데.
운전자와 피고인은 정확히 무슨 사이죠?
그냥 아는 형인데요.
제가 분명 정확히라고 말했을 텐데요.
그니까 그냥 아는 형이라니까요.
그건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친해졌고 어떤 경위로 만나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하세요.
형이랑 저는... (짧은 사이) 피어링이에요.
피어링이 뭐죠?
트래픽을 라우팅하는 건데요.
트래픽은 뭐죠? 라우팅은 또 뭐고요.
트래픽은 DAU 이탈률이고 라우팅은 그걸 테이레이하는 거예요.
야! 내가 너랑 말장난하려고 여기 있는 줄 알아?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이게 제일 정확히 말한 건데.
저희끼리는 다 이렇게 말해요.
검사님. 예의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직 피의자 신분이니까요.
진서의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잠깐 쉬었다 해도 될까요? 급한 전화라서.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피고인과 피어링하는 형의 이름이 뭐죠?
‘I’요.
사이. 전화벨이 뚝 끊긴다.
아이? 아이가 맞습니까?
아니요. ‘I’인데요.
알파벳 I요?
아니, ‘I’라니까요.
애 어른 할 때의 그 아이입니까?
아니, ‘I’라고요. ‘I’. ‘I’가 ‘I’지 도대체 뭐가 ‘I’예요!
암전.
3장검찰청 옥상
암전 상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난다.
지저귀는 소리가 사라질 때쯤, 조명 IN.
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상.
진서 입장. 이상을 보고 뒷걸음질 치다 이내 이상과 눈이 마주친다.
어색하게 이상에게 다가가는 진서.
담배 끊으셨어요?
어색하게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에요. 적응해야죠. 이제는 싫어도 봐야 하잖아요.
진서가 흡연을 시작한다.
언니랑 진짜 결혼할 거예요?
왜요?
왜긴요. 검사님은 우리 언니랑 절대 안 할 줄 알았으니까요.
언니는 뭐랄까. 외계인 같잖아요. 이상하고, 상식적이지도 않고.
딱 검사님이 싫어할 스타일 아닌가. 나처럼.
사이
변호사님은 결혼 안 하세요? 오래 만난 남자친구 있었던 걸로 아는데.
헤어졌어요.
왜요?
노코멘트 할게요. 여긴 취조실이 아니니까.
취조실이 아니라도 취조는 할 수 있지 않나요?
사이
검찰청 뒤에 있는 저 산에 가보신 적 있어요?
공원이요?
아뇨. 산이요. 공원은 저 산의 일부고요.
언니랑 저는 저 산에 자주 가거든요.
근데 저번에 갔을 때 산 깊숙한 곳에서 말을 본 거 있죠?
그거 그냥 고라니예요.
아니, 진짜 말이었다니까요?
물론,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정확히 볼 순 없었는데 그건 진짜 말이었어요.
저도 미려랑 런닝 하다가 본 적 있어서 그래요. 그거 고라니 맞아요.
정확히 보신 거예요?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검찰청 뒷산에 야생말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가족 아니랄까 봐 상상력들 참 좋네요.
그러게요. 엄마가 달라도 가족이긴 한가 봐요.
사이
검사는 왜 그만뒀어요?
재판 때마다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서요.
근데 그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누구한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는데 //
(말을 끊으며) 그건 죄책감이에요. 신입이 흔히 겪는 패턴이죠.
얼굴 보니까 변호사는 할만한가 보네요?
사이
뭐, 그냥 편해요. 변호사는 고객을 믿기만 하면 되니까.
비논리적이네요. 도덕적이지도 않고.
그만큼 실용적이죠.
돈이 참 좋긴 해요. 범죄자를 믿어주는 사람도 생기고.
돈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누가 보면 검사는 무료 봉사인 줄 알겠어요.
변하셨네요. 검사 때랑 다르게.
전 변하지 않았어요. 변한 건 우리 사이에 있던 앎의 정도겠죠.
사이
이쯤하고 들어가죠. 누가 보면 그렇잖아요.
같은 재판 맡을 사이가 맞담이라니. 무슨 작당 모의하는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맞담은 아니죠. 저 혼자 피고 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이상에게 전화가 온다. 전화를 받던 이상, 전화를 끊더니.
변호사님. 김군이 독을 먹은 것 같습니다.
암전.
4장병실
조명 IN
김군이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있다.
괘종시계와 김군 사이에 서 있는 이상.
형사 입장.
오랜만입니다. 검사님. 끝나고 술 한 잔 어떠세요?
형사님, 제가 지금 회포를 나눌 기분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옷을 벗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럼 안 되죠. 검사들이 옷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데.
사이
뭐, 들으셨겠지만 독을 먹은 걸로 추정됩니다.
근데 하필 그 시간에 CCTV 오류가 났고요.
CCTV에 오류가 생긴 걸 관리자들이 보고했는데
수사관이 취조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쓰러진 후였다고 하네요.
취조실에 침입한 흔적이 있나요? 목격자도 좋고요.
억지로 문을 연 흔적은 없었습니다.
목격자는 여럿 있었지만 누가 들어갔는지 정확히 말을 못 하는 상황이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죠?
국과수 말로는 김군이 먹은 독은 독사의 독이라더군요.
일반적으로 독사의 독은 먹어도 생명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강에 상처가 있으면 그곳으로 독이 침투해 문제가 발생하죠.
그런데 김군이 하필 구강 포진을 앓고 있었다.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독사의 독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요?
이건 뭐 순식간에 노인이 된 것 같군요.
아마 피부에 문제가 생기는 독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내부 장기에는 큰 문제 없다고 하네요.
CCTV는 뭐가 문제였는지 나온 게 있습니까?
아직 밝혀진 건 없습니다만, 내부 CCTV가 마비됐을 당시
검찰청 밖으로 뛰쳐나간 인물이 외부 CCTV에 찍혔다고 합니다.
현재 해당 인물을 추적 중이고요.
잡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그것까진...
때마침 울리는 전화. 형사가 전화를 받는다.
검사님. 도망친 용의자를 잡았다고 합니다. 근데 용의자가 농인이라더군요.
농인이요? 정말 농인이 맞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농인이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게 상상이 안 가서요.
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있으니까요.
그건 그냥 문학적 표현입니다.
먼 옛날, 그러니까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또 모르는 일이죠.
지금 저 가르치는 건가요?
그런 논리면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는 거죠?
짧은 사이
하하. 죄송합니다. 형사들이 무식하고 힘만 센 걸 까먹었네요.
통역사를 요청할까요?
짧은 사이
아뇨. 절차대로 하면 너무 오래 걸려요. 급한 대로 아는 변호사를 부를 겁니다.
그 변호사 남자친구가 농인이거든요. 뭐, 지금은 헤어진 거 같지만.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어쩌죠?
인간은 대어를 낚으면 다른 건 신경도 안 쓰죠.
진서에게 전화를 거는 이상.
변호사님. 지금 김군 살인 미수 용의자를 잡았는데 그 사람이 농인인 거 같아요.
통역사를 부르면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와서 통역해줄 수 있어요?
짧은 사이
여보세요?
뚝. 전화가 끊긴다.
괘종시계가 정각이 되자 댕댕 소리를 낸다.
곧바로 진서 입장.
이 사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빨리 오셨네요?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클라이언트가 살해당할 뻔했으니까요.
이유가 이상하네요. 그래봤자 범죄자인데.
아직 피의자입니다. 검사님. 심지어 미성년자요.
오랜만이네요. 진서씨.
둘이 아는 사이세요?
아뇨.
네. 뭐, 어쩌다 보니.
사이.
사건이 이상하긴 하더군요. 독사의 독이라니.
그것도 그런데 이 건은 솔직히... 상식적이지 않아요.
거긴 검찰청이었어요. 그것도 서울중앙지검.
사방이 CCTV고, 경비원만 수십 명이 넘는데
그런 곳에서 취조 중이던 피의자를 대놓고 독살하려 했다니.
뭐, 워낙 급했던 거겠죠. 꼬리를 밟히기 전에 자르는 건 상식적이잖아요.
전 이거 자살로 봐요.
그건 더 말이 되지 않는데요?
일단 독약을 소지하고 있던 게 불가능해요. 여긴 반입 검수가 원칙이니까요.
무엇보다 CCTV가 김군이 독을 먹는 구간만 죽어 있습니다.
14:44:41부터 무려 41초 동안만 말이죠.
그거야 우연히 꺼진 걸 수도 있죠.
최근 취조실 CCTV에 오류가 자주 발생했다는 정보를 받았거든요.
지금 CCTV가 우연히 꺼졌는데 하필 김군도 그때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겁니까?
최근 CCTV가 자주 꺼진 것과 김군이 독을 먹었을 때 CCTV가 꺼진 건
사건의 층위가 완전히 다를 텐데요.
이건 확률의 문제예요. 지금 그것까지 따지자는 건가요?
변호사님, 저희는 지금 삼류 작가조차 잊어버린 습작 따위를 재현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 사건 때문에 옷을 벗을 수도 있어요.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거죠.
김군이 독을 먹었고, 하필 그때 CCTV가 꺼졌다.
당연히 이 둘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근데 그건 있어 보이는 거지 정말 인과관계가 있다는 걸 의미하진 않잖아요.
모든 가능성을 연 상태로 사건을 //
(말을 자르며) 다시 말하지만, 저희는 사건을 빠르게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작가처럼 망상에 빠질 시간이 없다고요.
제발 가르치려 들지 좀 마세요.
본인이 만든 틀 안에 사건을 집어넣지 마시라고요.
처음엔 편하게 좀 생각해 봐요.
만약, 반입 검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혹은 검찰청까지 ‘I’의 손아귀에 들어간 거라면?
지금 검찰이 애들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까?
검사였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몇 번을 말해요. 가능성의 차원이라고.
김 형사님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하하. 저는 아는 게 없으니 여러분들 말에 맞춰 추임새를 넣겠습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말만큼 중요한 동물은 없으니까요.
변호사님, 옛날에 제가 분명 말했을 텐데요.
인간이 왜 그렇게 논리와 이성에 집착하는지.
정상 범주의 인간은 //
(말을 끊으며) 자신의 사유가 무한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대 사유의 알몸을 함부로 직시하지 마라.
뭐, 요즘은 다들 디지털로 알몸을 훔쳐보지만요.
그걸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그딴 식으로 말합니까?
전 검사님이 무슨 말을 한 건지 하나도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변호사님, 불안한 건 알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안 그러면 진짜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변호사님이 이성적으로 보는 법을 모르긴 하죠.
좀 닥쳐요. 김 형사님.
진짜 미쳤어요? 빨리 사과드려요.
됐어요. 미친년들은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사니까.
진서 퇴장.
범죄자 헛소리만 듣더니 진짜 미쳐버렸군.
그러게요. 자살이라니. 그건 정말 이상한 생각이에요.
변호사님은 왜 저렇게 생각하시는 걸까요.
형사님 생각보다 법조계엔 저렇게 어긋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제가 아는 검사는 재판 전에 굿을 한다는군요. 참 우스운 일이죠.
자기 재판에 확신이 없어서 하는 짓이 고작 신에게 의지하는 거라니.
사실 그 여자도 로스쿨 때 동기들에게 미친년이라 불렸어요.
(무전) “아, 아, 용의자 도착 10분 전.”
곧 용의자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저희도 검찰청으로 가죠. 그 파렴치한 낯짝을 빨리 보고 싶어요.
통역은 어떻게 하죠? 변호사님, 이제 안 오실 거 같은데.
올 겁니다. 진짜 미치지 않았다면 말이죠.
괘종시계가 또 울린다. 아직 정각이 되지 않았다.
이젠 시계가 미쳐버렸군요.
저건 더 이상 시계가 아닙니다. 시간을 잊은 시계를 시계라 부를 순 없죠.
암전.
5장취조실
조명 IN.
용의자가 들을 수는 있던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곧장 이곳으로 데려온 거라서요.
제 말 들리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임군.
잘 들리는군.
이상이 볼펜과 종이를 임군에게 건넨다.
듣고 사실만 쓰시면 돼요. 알겠죠?
볼펜과 종이를 받는 임군.
당신은 누구입니까?
임군이 잠시 멍때리더니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다 그린 임군이 종이를 이상에게 보여준다.
이게 뭘까요? 한국어는 아닌 거 같은데.
그림 같은데요.
한국어를 모르는 건가요?
잘 모르겠어요.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거죠?
사람 같은데요. 그것도 둘이요.
근데 이거 그림이 뭔가 좀 야하네요.
그런가요? 저는 싸우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진서 등장.
시작하면 돼요?
임군 옆에 자연스레 앉는 진서.
사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변호사님 반응이 좀 묘해서요.
왜요? 다시 올 줄 몰랐어요?
그게 아니라 거기 앉는 데 어색한 기색이 전혀 없어서요.
어색할 게 뭐 있어요. 방금까지 얼굴 붉히면서 봤는데.
아뇨. 저 말고 그 농인 말하는 거예요.
변호사님은 그 농인과 분명 초면일 텐데
방금 그 사람 옆에 앉는 변호사님은 뭐랄까. 서로 아는 사이 같았어요.
인간은 보통 낯선 걸 보면 반사적으로 몸을 수축하기 마련이죠.
그건 생물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요.
지금 중요한 건 제 반응 따위가 아닐 텐데요.
아뇨. 중요합니다. 지금 그 사람은 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농인치고도 너무 이상하고요. 한국인이 한국말을 모르는 게 말이 됩니까?
농인도 농인마다 다 달라요.
그럼 이 그림은 어떻게 설명할 거죠?
제가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이런 이상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치 제 질문을 회피하는 것처럼요.
쓰는 말이 다르면 보는 세계도 달라요.
수어를 쓰는 사람과 우리들의 세계는 조금 다를 수도 있어요.
그건 이론적 망상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변호사님, 진짜 이 사람이랑 아는 사이가 //
(말을 끊으며) 질문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이
이름. 나이. 직업.
진서와 임군이 수어를 나눈다.
이름은 임군. 나이는 30세, 무직이랍니다.
30세라고? 얼굴만 보면 고등학생인 줄 알겠는데.
검찰청엔 뭐 하러 왔지?
진서와 임군이 수어를 나눈다.
아버지 부탁으로 잠깐 온 것 같아요. 무슨 우편물을 갖다준 거 같은데.
아버지가 누군지 물어봐요.
진서와 임군이 수어를 길게 나눈다.
형사 1부 김이석 부장검사 아들인 거 같아요.
사이
그게 끝이에요?
네. 왜요?
대답에 비해 대화가 길었던 거 같아서요.
수어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간 감각도 다를 수 있어요.
김이석 부장은 아들 없이 딸만 둘 아니었나요?
글쎄요. 그쪽이랑은 친분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검사 시절에 저랑 같이 김이석 부장과 저녁을 먹은 적 있을 텐데요.
그래요? 전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기억이 //
(말을 끊으며) 왜 검찰청 밖으로 뛰쳐나간 거지?
내 말 함부로 끊지 마세요! 형사님. 오늘만 몇 번이 끊긴 건지 모르겠어요.
진서와 임군이 다시 수어를 나눈다.
멈추세요. 내 지시 없이 아무 대화도 하지 마세요.
이상의 말을 무시하고 수어를 진행하는 두 사람.
내 말 안 들려요? 멈추라고 했잖아요!
잠시만요. 그들이 오고 있대요.
그들? 그들이 도대체 누구죠?
임군이 다급하게 수어로 ‘I’를 표현한다. *수어에서 ‘나’와 I는 구별되지 않는다.
갑자기 취조실 불이 꺼진다.
뭐야? 밖에 누구야? 빨리 불 안 켜!
임군의 비명과 함께 꽃병 깨지는 소리, 의자 쓰러지는 소리가 혼잡하게 섞인다.
검사님, 여기 누가 있는 거 같아요!
앞이 안 보입니다. 대체 앞이 어디 있는 거죠?
이상이 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며 취조실 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임군.
세 사람 모두 있었던 위치가 아닌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우웩...
진서의 손에 칼이 들려 있다.
사방은 혈흔으로 뒤덮여있고, 세 사람 모두 피로 옷과 얼굴이 얼룩져있다.
검사님, 119! 119부터 불러주세요.
이미 늦었습니다.
미동조차 없는 임군. 죽어버렸다.
사이
형사와 이상이 진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다.
칼 내려놓으세요. 변호사님.
이건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지금 당신 손에 뭐가 있는지 안 보여? 그게 말이 //
(말을 끊고) 왜 울고 있죠?
사이
검사님, 제 말 좀 들어봐요.
불이 꺼졌을 때, 누군가 저한테 이 칼을 건네줬어요.
아마 그 사람도 ‘I’였겠죠.
저는 어둠 속에서도 제 손에 들린 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아, 이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진짜 무기구나.
전 너무 무서워서 그 칼을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칼을 거부했다면... 죽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칼을 꽉 잡았고... 그러니까...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잠깐만. 지금 내가 그 칼을 줬단 말처럼 들리는데?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형사님이겠네요.
문을 열겠다면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형사님이니까요.
문을 연 건 내가 아니라 검사님이야.
그럼 더더욱 이상하죠. 문을 열 것도 아니면서 왜 원래 자리에 없었죠?
문을 열 시도는 할 수 있잖아. 그보다 내가 이 사람을 뭐 하러 죽여.
나, 이 사람 오늘 처음 봐!
그거야 모를 일이죠. 내가 형사님 과거를 전부 알 순 없잖아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야? 여기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텐데.
형사님이 ‘I’일 수도 있어요.
아쉽지만 난 절대 ‘I’가 될 수 없어. 누가 봐도 난 어른이니까.
그냥 솔직히 말하지?
당신 나 싫어하잖아. 지금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형사님은 공과 사부터 구분하는 게 좋겠어요. 보기 안 좋으니까.
뭐? 먼저 공사친 게 누군데 공, 사 운운하는 거야?
다들 침착하세요. 이럴 때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
(말 끊으며) 공사요? 지금 말 다했 //
(말을 끊으며)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요!
당신들 말 때문에 진짜 미쳐버릴 거 같으니까.
난 당신들 과거 따위 전혀 관심 없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아요.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옷을 벗지 않는 거예요.
옷을 벗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사이
칼 줘봐요.
이 칼은 아무 의미 없어요.
그건 검사인 내가 정합니다.
진서가 이상에게 칼을 넘긴다.
눈을 감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살인자라도 된 마냥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 이상.
서서히 암전 시작.
허공에 복부를 찌르고, 심장을 찌르고, 두 눈을 찌르고.
끝내 자기 목을 긋고 자살하려 하지만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마는 이상.
완전한 암전과 함께 사방에서 수많은 괘종시계가 미친 듯이 댕댕 울린다.
6장뒷산
괘종시계 소리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로 변한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멈추면 조명 IN.
1장을 곧장 이어받는 미려와 I.
새가 전혀 안 보였는데?
이미 지나갔어요. 사실 지금도 지나가고 있고요.
생각보다 더 빨리 지나가네. 너가 없었으면 새가 있는지도 몰랐겠어.
근데 누나는 아무렇지 않아요? 오랫동안 새를 봤는데도?
누군가와 함께 새를 본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인 거 같아.
누나는 재밌는 사람이네요. 꼭 철학자 같아요.
그러니?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한단다.
괜찮아요. 사람들은 절 괴물이라 부르거든요.
그럼 괜찮겠다. 외계인 눈엔 모두가 괴물일 테니까.
혹시 혼자서도 새를 볼 수 있어?
그 새에게 이름을 지어 너한테 주고 싶은데.
고마워요. 하지만 그 새의 이름을 부르는 건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거예요.
그 새의 이름은 잘못 부르면 미쳐버릴 수도 있거든요.
만약, 그 새의 이름이 아닌 본인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당장 그 새를 죽이고 새로운 새를 찾아야 해요.
안 그러면 평생 본인 얼굴만 보며 살게 될 수도 있거든요.
설마 자살하라는 말이니?
아니요. 자살하지 않고 나를 죽이는 거예요.
새의 이름을 부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구나.
맞아요. 그 새의 이름을 부르는 건 용감한 자만 가능해요.
난 겁이 많은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누나가 찾던 말을 쫓다 보면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말을 쫓는 과정은 참으로 길어서 그 새를 오랫동안 볼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겠다. 어서 그 새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거든.
하지만 지금 말을 찾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이에요.
이 숲은 밤이 되면 낮보다 밝아져
말로 향하는 길을 무한보다 무한하게 만들거든요.
앞이 너무나 잘 보이는 길은 우리의 목적을 잃게 만들어요.
빛은 투명한 우리 속 괴물들로 가득해 언제든 우리의 기억을 빼앗으니까요.
정말이네. 어느새 무의미하게 밝은 별들로 밤하늘이 가득 찼어.
하지만 난 밤이 좋아. 그래서 가을밤과 그새 사랑에 빠졌지.
너야말로 어서 집에 들어가렴. 어린 이에게 이 여름밤은 몹시 떫을 테니까.
괜찮아요. 어린이의 밤은 늘 뒤늦게 찾아오니까요.
나도 너만 할 때가 있었어. 특히 새벽에 몰래 까먹는 밤을 참 좋아했지.
물론, 그 밤은 지금이란 신비만큼 나에게서 탈구된 기억이 됐지만.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가야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했거든.
잘 있어. 어른 같은 아이야. 다음에 또 보자꾸나.
기억의 여신이 너와의 시간을 허락한다면 말이야.
그동안 열리지 않았던 다른 문을 열며 미려 퇴장. 괘종시계까지 울리기 시작한다.
잘 가요. 누나. 또 봐요.
아니, 이미 또 봤네요.
그러니 안녕. 그래서 안녕.
암전. 아주 오랫동안, 새 지저귀는 소리와 괘종시계 소리가 함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