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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 · 2026

말하기 위해 말타기

정재용
Characters
  • 소녀
  • 아이
  • 노인

1막

봄, 벚꽃잎이 장맛비 쏟아지듯 떨어진다.
벚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아이가.
소녀는 멀리서 아이의 춤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다그닥 다그닥.
춤을 멈춘다. 아이가.
소녀는 춤을 멈춘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몸을 돌려 서로를 등진 채로 자리에 앉는다.

아이

무슨 일이야? 주말에 경마장까지 따라오고.

소녀

할 말이 있어.

아이

뭔데?

소녀

말할 수 없어.

아이

말도 못 할 거면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

소녀

그냥. 심심해서.

아이

또 거짓말하네. 빨리 집이나 가. 여기 있으면 어른들한테 혼나.

소녀

싫어. 어디로 나가는지 모른단 말이야.

아이

그럼, 너도 베팅이나 해. 너는 연승으로 하는 게 좋겠다.

소녀

난 도박 같은 거 안 하는데.

아이

경마가 왜 도박이야? 이건 엄연한 예술이야.
말과 인간이 합심해서 만드는 속도의 예술이지.

소녀

됐어. 난 그냥 보기만 할래.

아이

시시하긴. 니가 그러니까 애들한테 맞고 다니는 거야.
머리에 혹 난 것 좀 봐.

소녀

너처럼 하루 종일 경마장에 있는 것보단 낫지.

사이

소녀

그래서. 니가 응원하는 말은 무슨 말인데?

아이

거짓말쟁이한테 알려줄 말은 없어.

소녀

야,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

아이

이거 봐. 또 거짓말하고 있잖아.
넌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면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도 모르냐?

소녀

됐어. 알려주기 싫으면 알려주지 마.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흰색 벽면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이

갑자기 그림은 뭐 하러 그려?

소녀

알아서 뭐 하게? 넌 니가 좋아하는 말이나 열심히 봐.
난 여기서 그림이나 그릴 테니까.

아이

난 너처럼 애처럼 구는 애는 질색이야.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녀

야! 어디가?

아이

알아서 뭐 하게? (소녀의 표정을 힐끔 보더니) 화장실 간다. 왜.

소녀

같이 가줘?

아이

됐어. 내가 애냐?

아이, 밖으로 나간다. 소녀, 혼자 남는다.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한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아이가 무대 위로 돌아온다.

아이

야, 넌 배 안 고파?

소녀

배고파? 나 엄마가 간식 사 먹으라고 용돈 줬는데. 이걸로 뭐 사 먹을까?

아이

그래도 돼? 근데 여기는 시켜 먹어야 하는데.

소녀

주변에 먹을 데 없어?

아이

없지. 요즘은 경마 보는 사람 많이 없으니까.

소녀

근데 지금은 왜 많아?

아이

쟤네는 사람이 아니잖아.

소녀

그럼, 저 사람들은 뭔데?

아이

뭐긴 뭐야. 말이지.

소녀

거짓말.

아이

난 얼룩말 할래.

아이, 말 흉내를 낸다.
귀엽다는 듯 아이를 쳐다보던 소녀도 아이를 따라 말 흉내를 낸다.
말 흉내를 내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두 사람.

아이

뛰어다니니까 배고프네. 넌 배 안 고파?

소녀

배고프긴 한데 난 그냥 여기서 그림 그릴래.

아이

그림은 집에 가서 그려. 경마장에 왔으면 말을 봐야지 그림을 보면 어떡해?

소녀는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를 이어 말의 형상으로 바꿔나간다.
어느새 벽면에 말 한 마리가 완성된다.

소녀

이러면 불만 없지?

아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 넌 경마장까지 와서 말로 장난하고 싶냐?

소녀

그럼, 니가 응원하는 말이 뭔지 알려줘. 그래야 너랑 그 말을 기다릴 거 아니야.

아이

됐어. 빨리 집이나 가. 너랑 있으니까 정신 사나워서 말에 집중을 못 하겠어.

소녀

싫어.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아이

빨리 가라니까?

소녀

안 돼. (짧은 사이) 지금 가면 아빠한테 들켜.

아이

너희 아빠가 너 여기 있는 거 알아?

소녀

말하고 나온 건 아니야. 근데 아빠는 우리가 만나는 걸 다 알고 있어.

아이

너희 아빠는 내가 왜 그렇게 싫대? 나 진짜 이상한 애 아닌데.

소녀

알아. 근데 아빠는 그냥...

소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소녀가 그림 그리는 걸 지켜보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소녀는 아이가 간 줄도 모르고 열심히 그림 그리기에 집중한다.

소녀

나 진짜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있거든?
근데 이걸 말해도 너가 믿어줄지 모르겠어.
근데도 넌 내가 이걸 말하면 좋겠어?

소녀,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2막

여름, 빗소리가 단풍 떨어지듯 살포시 깔린다.
소녀는 1막에서 마무리된 그림을 이어서 그리고 있다.
무대 안으로 들어오는 노인.

노인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소녀

보면 몰라? 그림 그리고 있잖아.

노인

(소녀의 볼을 잡아당기며) 누가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래?

소녀

(노인의 팔을 내치며) 이런 것 좀 하지 마요.

사이

소녀

죄송해요. 할아버지가 아니라 친구인 줄 알았어요.

노인

친구? 친구랑 경마장엔 왜 들어왔어? 이 칙칙한 곳에 뭐 볼 게 있다고.

소녀

말 있잖아요. 저는 말 좋아하거든요.

노인

알겠으니까 이제 집에 가. 애들은 이런 데 오는 거 아니야.
경마장은 정신머리 없는 애들이나 와서 시시덕거리는 곳이지.

소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할아버지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노인

내 말? (짧은 사이) 내가 어떤 말을 기다리는 거 같니.

소녀

딱 봐도 저 말이잖아요. 생긴 것도 호랑이처럼 생겨서 잘 달릴 것 같은데요.

노인

저 말은 요즘 유행하는 말이야.
저렇게 생긴 말들이 단거리에 아주 강하지.
근데 저런 말에는 베팅하는 게 아니야.

소녀

왜요?

노인

왜긴. 저런 말들은 너무 빨리 지쳐버리거든.
말로 재미 좀 보려 하면 자기 멋대로 끝나버리지.

소녀

할머니도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영화는 재미 좀 보려고 할 때마다 끝난다고요.
제가 할머니한테 영화가 왜 그렇게 좋냐고 물어본 적 있었거든요.

노인

영화는 경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
말 나온 김에 다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

사이

소녀

됐어요. 할아버지 영화 싫어하잖아요. 엄마가 할아버지 영화 싫어한다 그랬어요.

노인

무슨 소리야. 내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특히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

사이

노인

왜 말이 없어? 가기 싫어?

소녀

저 주말에 데이트 가야 해요.

노인

뭐? 데이트? 설마 경마장에 같이 왔다는 그 친구랑?

소녀

할아버지. 아직 커플 아니고 저만 좋아하는 거예요.
걔는 제가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노인

이렇게 귀여운 애가 자길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한 번 데려와라. 어떤 녀석인지 낯짝 한번 보자.
아니지. 지금 여기 있다는 거잖아? 내가 그 녀석 낯짝 좀 직접 봐야겠다.

노인이 무대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소녀

할아버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거 그만 좀 해요. 진짜 짜증 나니까.

노인이 발걸음을 멈춘다. 노인의 반응을 살피는 소녀.

소녀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시인이라고 했었죠?

노인

누가 그래? 내가 시인이었다고.

소녀

엄마가 그러던데. 젊었을 때 나름 알아주는 시인이었다고.

노인

(뒤를 돌아 소녀 곁으로 오며) 알아주는 시인은 무슨. 그냥 말장난 좀 한 거지.

소녀

근데 시는 뭐 하러 쓰셨어요?

노인

말장난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야.
말장난이 있고 그다음에 이유가 생기는 거지.

소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노인

무슨 말이긴. 그냥 야생말이지.
(목을 가다듬더니) 야생말은 달린다. 세월도 달린다.
말이 달리니까 내 마음은 두근두근.
두근두근. 새근새근. 고놈 참 잘도 잔다.
우리 아이 자는 소리 어느 새가 물고 갔나.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 웃는 소녀.

노인

뭐가 그렇게 웃겨?

소녀

그거 할아버지가 쓴 시예요?

노인

그건 아니고.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시인이 쓴 거야.
옛날에 무척 유명했던 시인인데 너무 옛날이라 이름이 기억 안 나네.

소녀

진짜 시인이 쓴 시 맞아요? 못 썼다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데.

노인

니가 시를 잘 몰라서 그래. 이거 엄청 잘 쓴 시야.

소녀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감탄이 나와야 잘 쓴 시죠.

사이

노인

근데 넌 뭘 그리고 있던 거냐?

소녀

말을 그리고 있었어요. 어때요? 진짜 말 같죠.

노인이 소녀의 손에 있는 크레파스를 가져가더니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그린다.
말이 점차 본래의 형상을 잃어간다.

노인

(그림을 그리며) 말은 이렇게 그려야 진짜 말처럼 보이지. 안 그러냐?

노인이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는 동안, 소녀가 무대 밖으로 나가버린다.
노인은 소녀가 무대 밖으로 나갔음에도 그림 그리는 것에 집중한다.

노인

할아버지가 사실 할 말 있어요.
그...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거 같거든?
확실한 건 아닌데 요즘따라 깜빡깜빡하는 게 더 심해져서 말이야.
무서운 건 아니고. 아니, 솔직히 무서울 때도 있는데.
너 생각엔 어떠니. 내가 진짜 치매 같아?

뒤를 돌아보니 소녀가 없어 당황하는 노인.
급하게 무대 밖으로 향하다 발걸음을 멈춘다.
한참을 무대 밖을 응시하다가 이내 벽 앞으로 돌아와 마저 그림을 그린다.

3막

가을, 함박눈 내리듯 은행잎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아이는 2막에서 노인이 그리다 멈춘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소녀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소녀, 아이 주위를 맴돌더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린다.

소녀

밥은?

아이

지금이 몇 신데 밥 타령이냐? 니 없는 동안 내가 다 먹었다.

소녀

(그림 그리기를 멈추며) 뭐? 왜 나 빼고 먹어!

아이

내 맘이다. 왜!

소녀

그보다 이 경마장은 왜 경기 시작을 안 해?

아이

말은 니가 보고 싶을 때 달리지 않아.
자기가 달리고 싶을 때만 달리지.
(그림 그리기를 멈추며)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빨리 집에 좀 가.

소녀

싫어. 나도 경기 보고 갈 거야.

아이

빨리 가라니까? 너 있으면 오던 말도 안 온다고.

소녀

뭐래. 말은 자기들 마음대로 온다며.

아이

넌 그 말을 진짜 믿냐?

소녀

됐고. 나 이번에 연극 올리는데 연습이나 도와줘.

아이

너 연극 해? 넌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하냐.

소녀

뭐래. 내가 여름부터 계속 말했는데.

아이

아니거든? 난 들은 적 없거든?

소녀

됐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이

까탈스럽긴. 알겠어. 도와주면 되잖아. 도와주면. 뭐 하면 되는데?

소녀

(희곡을 주며) 자, 이 부분을 따라 읽으면 돼. 넌 노인 역할이야.

아이

노인? 노인 말고 멋있는 거 없어? 멋없게 노인이 뭐야. 노인이.

소녀

여기선 노인이 멋있는 주인공이야. 그러니까 빨리 저기로 가.

아이는 투덜거리며 소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소녀

할아버지.

사이

소녀

할아버지!

아이

불렀어?

소녀

(한숨을 쉬며) 역시 엄마 말이 맞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지금 병원에 가야 해요.

아이

갑자기 병원은 왜?

소녀

엄마가 그러는데 할아버지 치매래요.

사이

아이

고맙다. 덕분에 이게 현실인 걸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저리 가서 놀아.

소녀

할아버지, 이건 농담이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어요.
방금 제가 부르는 것도 기억 못 하셨잖아요.

아이

그건 니가 부르는 걸 못 들은 거잖아.

소녀

엄마가 아빠랑 얘기해 봤는데 할아버지는 치매가 맞는 거 같다고 했어요.

아이

그래? (짧은 사이) 너도 내가 치매 같아?

소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아빠가 그랬으니까 당연히 치매지 않을까요?
아빠는 아주 유명한 의사니까요.

아이

근데 난 진짜 치매가 아니란다. 그냥 기억력이 평균보다 조금 더 안 좋은 거지.

소녀

할아버지는 의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이

아이

아무튼 난 치매가 아니야.
넌 내가 병원이 무서워서 거짓말이나 하는 겁쟁이로 보여?

소녀

그건 아닌데 오늘 병원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어요.

아이

치매 아니라니까!

사이

소녀

야, 그거 여기 없는 대사잖아.

아이

이 희곡 완전 쓰레기네.

소녀

뭐래. 이거 엄청 유명한 작가가 쓴 건데.

아이

내 생각엔 노인 빼고 싹 다 치매야.
노인은 치매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꾸 노인을 치매라고 부르잖아.

소녀

할아버지는 치매가 맞아. 니가 결말을 한 번 봐봐.

아이

작가가 치매라고 쓰면 다 치매야?

소녀

그럼 아니야?

사이

아이

넌 거짓말하는 게 재밌지?

소녀

뭐래. 넌 왜 자꾸 나한테 거짓말했다고 하냐? 말해봐. 내가 언제 거짓말했는데.

아이

몰라. 나 그냥 말 보러 갈래. 따라오지 마!

아이, 무대 밖으로 나간다.
소녀는 차마 아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아이를 바라본다.
혼자 남은 소녀는 아이와 함께 그린 그림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점차 말 형상으로 변해가는 그림.
그러나 소녀는 말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아이가 나간 방향으로 뛰쳐나간다.

4막

겨울, 싸라기눈이 벚꽃처럼 휘날린다.
벽에는 3막에서 그리다 만 그림이 남아 있다.
노인,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는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한다.

노인

저기 좀 봐봐.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는 말이 보이기 시작했어.

소녀

어디요?

노인

저기 있는데 안 보여?

소녀

잘 안 보이는데요.

노인

조금만 더 기다려 보렴. 그럼, 어느 순간 보이기 시작할 거야.

소녀

할아버지. 전 솔직히 어떤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이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을 기다리다간 진짜 숨넘어가겠다고요.

사이

소녀

할아버지! 듣고 계세요?

노인

어젠가 그저께 내가 경마장에서 경주하는 꿈을 꿨어.
묘했던 건 내 어깨 위에 나랑 똑 닮은 놈이 앉아 있었다는 거야.
그놈은 나를 말처럼 거칠게 다뤘지.
그놈은 채찍으로 날 때리고 다리로 목을 조르면서
어떻게든 내가 뛰도록 만들었어.
꼭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야.
경기가 시작된 뒤로 줄곧 달리기만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내가 달리고 있는지 서 있는지 분간이 안 될 때쯤이었나.
옆을 보니 말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
나는 그 말한테 말을 걸었어. 입을 아주 크게 벌렸지.
그러니까 꿈에서 깨버리더라. 옷은 식은땀에 홀딱 젖어 있었고.
외로웠어. 그 녀석 때문에.

긴 사이

노인

시원하구나. 바람이 부나?

소녀

할아버지. 할아버지 옆엔 제가 있어요.
그리고 (짧은 사이) 제가 있어요.

노인

너도 내가 싫지?

사이

소녀

아니에요. 제가 할아버지를 왜 싫어해요.

노인

나 치매 아니다. 정말로.

사이

소녀

그럼요. 할아버지가 왜 치매예요. 할아버지 치매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치매면 말을 보지도 못했겠죠.
지금도 경마장이 아니라 병원에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제 머리 보세요.
사람들은 여기 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걸 혹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건 뿔이거든요.

노인

뿔이 아주 매끈매끈하네. 꼭 피부처럼 말이야.
근데 병원에 비하면 경마장은 아주 저렴해. 이걸 꼭 말해주렴.

소녀

할아버지! 할아버지 치매 아니라니까요?

노인

거짓말을 참 예쁘게 하는구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예쁜 걸지도 모르겠지만.

소녀

아, 짜증 나.
할아버지! 제 말을 믿지도 않을 거면 왜 저한테 치매가 아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노인

우리 게임 하나 할까?
게임에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물어보는 말에 거짓 없이 답해주는 거야.

소녀

좋아요. 대신 할아버지는 제가 이기면 제 말 믿어주셔야 해요. 알겠죠?

노인

그래. 내가 있는 힘껏 믿어보마.

소녀

게임은 뭐로 하실래요?

노인

끝말잇기 어때?

소녀

좋아요. 제가 먼저 할게요. 음... 경마.

노인

마, 마음.

소녀

음, 음악.

노인

악, 악사.

소녀

사, 사랑.

노인

랑, 랑... 앙으로 바꿔도 되나?

소녀

편한 대로요.

노인

앙심.

소녀

심, 심해.

노인

해, 해 질 녘.

소녀

녘... 녘... 녘...

사이

노인

역시 내가 이겼네.

소녀

취소. 취소. 다른 게임 해요. 우리. 이번 건 연습 게임이라 치고요.
우리 춤춰요. 춤.

노인

춤을 추자고? 여기서?

소녀

싫으면 하지 마세요. 저야 안 하면 그만이니까.

노인

아니, 한다고 쳐도 그걸로 어떻게 승패를 정하자는 거야?

소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죠.

노인

여기 사람이 어디 있어? 내 눈엔 말밖에 안 보이는데.

소녀

말도 보고 들을 줄 알아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느낄 수도 있어요.

노인

그래. 할아비가 졌다. 대신 너부터 춰라. 얼마나 잘 추는지 보자.

소녀

좋아요. 보고 놀라지나 마세요.

소녀, 몸을 풀더니 춤을 춘다.
춤이 끝나자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소녀

어때요? 꽤 잘 추죠?

노인

그래. 잘 추는구나. 근데 그 춤 실력은 누구한테 물려받았을 거 같니.

노인, 몸을 풀더니 춤을 춘다.
노인의 춤을 보더니 소녀도 노인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즐겁게 춤을 추는 두 사람.
춤이 끝나자 터져 나오는 함성.

소녀

할아버지! 왜 이렇게 잘 추세요?

노인

할아버지가 왕년에 춤 좀 췄던 거 얘기 안 했나?

소녀

진짜요? 그럼, 할아버지는 시도 쓰시고 춤도 추셨던 거예요?

노인

시? 내가 시를 언제 썼어. 난 춤밖에 출 줄 몰라.

사이

노인

왜 말이 없어? 내 춤이 그렇게 굉장했나?

소녀

그럼요. 꼭 꿈꾸는 것 같았어요.

노인

그래도 춤은 경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야.
달리는 말 앞에 서 있으면 우리는 한없이 초라해지지.
하지만 말 위에 타 있는 인간을 보면 못돼 처먹은 우월감을 느끼기도 해.

소녀

할아버지. 근데 저희 뭐 잊어버린 거 없어요?

노인

잊었는지 잃어버렸는지 모르겠고 난 화장실부터 가야겠다. 너무 오래 참은 거 같아.

소녀

맞다. 할아버지! 가기 전에 물어보고 가요.

노인

뭘 물어? 니가 껌도 아니고.

노인, 호탕하게 웃는다.
소녀, 웃지 않는다.

소녀

할아버지. 저도 화장실 갈래요.

노인

난 여자 화장실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소녀

괜찮아요. 같이 가요.

소녀와 노인이 함께 무대 밖으로 나간다.

5막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룬 채 서 있다.
소녀는 노인을, 노인은 아이를, 아이는 소녀를 바라본다.
벽에는 여전히 말 그림이 남아 있다.

소녀

경기 끝나면 뭐 할 거야?

노인

뭘 하긴. 다음 경기 기다려야지.

소녀

집에 안 가?

노인

니가 내 엄마냐? 알아서 할게.

소녀

나 이제 여기 못 와.

사이

소녀

야! 듣고 있어?

아이

듣고 있어. 왜 못 오는데? 너희 아빠가 나 그만 만나래?

소녀

응. 나 입원하거든.
여기 혹 보이지? 이게 사실 뿔이거든?
그래서 뿔을 제거할 때까지 병원에서 살아야 해.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아빠 엄청 유명한 의사니까.

사이

노인

뭐, 그래도 경마장보단 병원이 좋지.
여긴 말똥 냄새랑 도박 중독자들로 가득하니까.
애초에 넌 여기 있을 사람도 아니고.

소녀

하지만 나도 말 좋아하는데.

노인

왜?

소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좋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막 두근거리거든.

노인

말발굽 소리랑 헷갈린 거야. 그러니까 뿔이 사라져도 이젠 여기 오지 마.

소녀

왜? (짧은 사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노인

그럼 있지. 없겠냐?

소녀

누군데? 예뻐? 귀여워? 아니면...

노인

웃겨.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와.

소녀

웃겨서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좋아해서 웃긴 거야?

노인

그걸 꼭 알아야 하나? 웃기면 그걸로 됐지.
넌 꼭 이상한 데 꽂혀서 사람 귀찮게 굴더라.

소녀

넌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노인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결혼부터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넌 그게 왜 궁금한데?

소녀

(짧은 사이) 난 우리 할아버지가 엄청 싫었어.
할아버지는 너처럼 경마장을 좋아했는데 얼마나 좋아했냐면
할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경마장에 갔어.
근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경마장에 갔다는 걸 듣더니 배를 잡고 깔깔 웃더라.

노인

왜?

소녀

그럴 거 같았대.

노인

그게 뭐가 웃기지. (짧은 사이) 미안.

소녀

아니야. 나도 그때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어.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
근데 경마장에 오고 나니까 할머니를 이해하고 싶어졌어.

사이

아이

우리 사진 찍을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소녀

정말? 너 사진 찍는 거 싫어하지 않아?

아이

아니야. 나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데.

소녀

그럼, 사진 말고 영상 찍어도 돼?

아이

뭐 찍을 건데?

소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노인을 찍기 시작한다.

소녀

난 있지? 나중에 영화감독이 될 거야.

아이

왜?

소녀

사람들이 평소에 보지 못하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너 영화 좋아해?

아이

좋아하지. 특히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해.

소녀

(짧은 사이) 우리 가족도 그 영화 좋아하는데.

아이

진짜? 나중에 너희 부모님께 꼭 말해줘. 나도 당나귀 나오는 그 영화 좋아한다고.

소녀

당연하지. 꼭 말해줄게.

사이

아이

지금 뭐 찍고 있는 거야?

소녀

비밀. 나중에 내가 보고 싶어지면 그때 확인해 봐.
지금은 안 보이던 게 그때는 보일지도 모르니까.

아이

난 유령 같은 거 안 믿는데.

소녀

넌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쩔 거야?

아이

글쎄. 경마장에 가지 않을까?

소녀

왜?

아이

말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들거든. 꼭 말이 된 것처럼 말이야.

소녀

가족들이 널 병원에 보내려고 하면 어쩔 거야?

아이

그럼, 말을 타고 도망쳐야지.

소녀

어디로?

아이

글쎄. 근데 일단 말을 타는 게 좋을 거 같아.

소녀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아이

진짜 내가 걱정되면 가족들도 말을 타고 날 따라오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소녀

난 말을 탈 줄 몰라서 잘 모르겠어.

아이

아니야. 우리 저번에 같이 탄 적 있잖아. 기억 안 나?

소녀

미안. 기억이 안 나.

아이

그럼, 말에 타볼 생각은 있어? 잘 못 타더라도.

소녀

모르겠어. 보는 건 좋은데 타는 건 무서울 거 같아.

사이

아이

집에 가. 이제.

소녀

진짜 가?

아이

어.

소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소녀

나 진짜 간다?

아이

빨리 가.

소녀

오늘은 경기 끝나고 가면 안 돼? 이제 영원히 못 오잖아.

아이

내가 말했잖아. 말은 우리가 원할 때 달리지 않는다고.
니가 떠나면 그때 경기가 시작될 거야.

소녀

나한테 할 말 없어? 진짜 마지막이잖아. 우리.

사이

노인

고마웠어. 같이 있어 줘서.

소녀

아니야. 내가 좋아서 있던 건데 뭘.

노인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소녀

미안했어.

노인

뭐가?

소녀

말해주지 못해서.

노인

뭘 말하지 못했는데?

소녀

말할 수 없어.

노인

마지막인데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봐. 난 괜찮으니까.

긴 사이

소녀

사랑해.

아이, 호탕하게 웃는다. 노인은 웃지 않고 여전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소녀

왜 웃어?

아이

미안해. 근데 너무 웃긴 걸 어떡해.

소녀

뭐가 웃겨? 넌 내가 사랑한다는 말이 웃겨?

아이

그건 아닌데 넌 어떻게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하냐.

소녀

됐어. 나 진짜 갈래.

아이

잘 가. 갈 때 말 타고 가는 거 잊지 말고. 백마 탄 공주님처럼 말이야.

소녀, 아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진다.
탕!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리자, 소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이는 말발굽 소리에 맞춰 벚나무 아래에서 추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말발굽 소리는 점차 격렬해지고 아이의 춤도 덩달아 격렬해지기 시작한다.

소녀

야! 빨리 말에 타! 저기 보이는 저 말을 타고 도망가라고!

가만히 있던 노인도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인은 아이의 춤사위와 무관하게 자신만의 춤을 그려나간다.

소녀

내 말 안 들려? 저 말에 타고 아주 멀리 가버리라고!

말발굽 소리가 너무 격렬해지자 소녀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질 않는다.
소녀는 소리 없이 아우성치고 노인과 아이는 소리 없이 춤을 춘다.
점차 말발굽 소리가 작아진다.
벚꽃잎이 장맛비 쏟아지듯 떨어진다.
벚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아이와 노인이.
소녀는 멀리서 아이와 노인의 춤을 바라보고 있다.
춤을 멈춘다. 아이와 노인 모두.
소녀는 춤을 멈춘 두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서로를 마주 보는 세 사람. 몸을 돌려 서로를 등진 채로 자리에 앉는다.
세 사람 모두 서로 다른 방향의 허공을 응시한다.

아이

무슨 일이야? 주말에 경마장까지 따라오고.

소녀

할 말이 있어.

노인

뭔데?

긴 사이.

고요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연하다.
오직 말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