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위해 말타기

DD · 2026.07





말하기 위해 말타기



등장인물 


소녀 
아이 
노인 


1막


봄, 벚꽃이 비 오듯 떨어진다.
벚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아이가. 
소녀는 멀리서 아이의 춤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다그닥 다그닥. 
춤을 멈춘다. 아이가. 
소녀는 춤을 멈춘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몸을 돌려 서로를 등진 채로 자리에 앉는다. 



아이 : 무슨 일이야? 주말에 경마장까지 따라오고.
소녀 : 할 말이 있어. 
아이 : 뭔데?
소녀 : 말할 수 없어. 
아이 : 말도 못 할 거면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 
소녀 : 그냥. 심심해서. 
아이 : 또 거짓말하네. 됐으니까 빨리 집에 가. 여기 있다가 괜히 어른들한테 혼나지 말고.
소녀 : 싫어. 어디로 나가는지 모른단 말이야.
아이 : 그럼, 너도 베팅이나 해. 너는 연승으로 하는 게 좋겠다. 
소녀 : 싫어. 난 도박 같은 거 안 해.
아이 : 경마가 왜 도박이야? 이건 엄연한 스포츠야. 
            말과 인간이 합심해서 만드는 속도의 예술이지. 
소녀 : 됐어. 난 그냥 보기만 할래.
아이 : 시시하긴. 니가 그러니까 애들한테 맞고 다니는 거야. 
            머리에 혹 난 것 좀 봐. 
소녀 : 이거 혹 아니고 뿔이거든. 바보야.
아이 : 니가 혹부리 영감이냐? 그게 어떻게 뿔이야. 
소녀 : 흥. 믿거나 말거나. 니 맘대로 해.


사이


소녀 : 니가 응원하는 말은 무슨 말인데?
아이 : 거짓말쟁이한테 알려줄 말은 없어. 
소녀 : 야,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 
아이 : 뭐래. 너 또 거짓말하고 있잖아. 
            넌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면 본인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도 모르냐?
소녀 : 됐어. 알려주기 싫으면 알려주지 마.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흰색 벽면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이 : 갑자기 그림은 왜 그려?
소녀 : 알아서 뭐 하게? 넌 니가 좋아하는 말이나 열심히 봐. 
         난 여기서 그림이나 그릴 테니까.
아이 : 난 너처럼 애 같은 애는 딱 질색이야.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녀 : 야! 어디가? 
아이 : 알아서 뭐 하게? (소녀의 표정을 힐끔 보더니) 화장실 간다. 왜. 
소녀 : 같이 가줘?
아이 : 됐어. 내가 애냐? 

아이, 밖으로 나간다. 소녀, 혼자 남는다.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한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아이가 무대 위로 돌아온다. 

아이 : 배 안 고파?
소녀 : 엄마가 간식 사 먹으라고 용돈 줬는데. 이걸로 뭐 사 먹을까? 
아이 : 좋아. 근데 여기는 시켜 먹어야 해. 
소녀 : 주변에 먹을 데 없어?
아이 : 없지. 요즘은 경마 보는 사람 많이 없으니까.
소녀 : 근데 지금은 왜 많아? 
아이 : 쟤네는 사람이 아니야. 
소녀 : 그럼, 저 사람들은 뭔데?
아이 : 뭐긴 뭐야. 말이지. 
소녀 : 거짓말.
아이 : 조랑말?
소녀 : 난 얼룩말 할래. 

소녀, 말 흉내를 낸다. 
귀엽다는 듯 소녀를 쳐다보던 아이도 소녀를 따라 말 흉내를 낸다. 
말 흉내를 내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두 사람. 

아이 : 뛰어다니니까 배고프네. 넌 배 안 고파?
소녀 : 배고프긴 한데 난 그냥 여기서 그림 그릴래. 
아이 : 그림은 집에 가서 그려. 경마장에 왔으면 말을 봐야지 그림을 보면 어떡해? 

소녀는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를 이어 말의 형상으로 바꿔나간다.
어느새 벽면에 말 한 마리가 완성된다.

소녀 : 이러면 불만 없지? 난 말 그림 그릴래. 

갑자기 아이가 소녀 손에 있는 크레파스를 뺏더니 그림에 낙서한다. 
말이 점차 본래의 형상을 잃어간다. 

아이 : 이젠 말이 아니라 그림 같지?
소녀 :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 넌 경마장까지 와서 말장난하고 싶냐?
아이 : 그림은 니가 먼저 그렸잖아. 같이 경기 보자니까. 
소녀 : 그럼, 니가 응원하는 말이 뭔지 알려줘. 그래야 너랑 그 말을 기다릴 거 아니야. 
아이 : 됐으니까 집에 가. 너랑 있으면 정신 사나워서 말에 집중을 하나도 못 하겠으니까. 
소녀 : 싫어.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아이 : 빨리 가라니까?
소녀 : 안 돼. 지금 가면 엄마한테 들켜. 
아이 : 너희 엄마는 내가 왜 그렇게 싫대? 나 진짜 이상한 애 아닌데.
소녀 : 알아. 근데 엄마는 그냥. (짧은 사이) 잘 모르겠어. 

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녀 : 야! 또 어디가! 
아이 : 화장실! 
소녀 : (짧은 사이) 혼자 갈 수 있어?
아이 : 내가 너 같은 애인 줄 알아?
소녀 : 야, 잠깐만.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소녀 차마 아이를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을 바라본다. 
아이, 소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간다. 

소녀 : 나...

고개를 들어 아이가 없음을 확인하는 소녀.

사이

소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2막 

여름, 빗소리가 단풍 떨어지듯 살포시 깔린다.
소녀는 잔뜩 어지럽혀진 상자 더미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다. 
그때 무대 안으로 들어오는 노인.


노인 : 위험하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소녀 : 보면 몰라? 건물 짓고 있잖아. 
노인 : (소녀의 귀를 잡아당기며) 누가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래?
소녀 : 죄송해요. 할아버지. 제 친구인 줄 알았어요. 
노인 : 친구? 친구랑 경마장엔 왜 들어왔어? 이 칙칙한 곳에 뭐 볼 게 있다고. 
소녀 : 말 있잖아요. 저는 말 좋아하거든요. 
노인 : 알겠으니까 이제 집에 가. 애들은 이런 데 오는 거 아니야.
         경마장은 정신머리 없는 환자들이 와서 시시덕거리는 곳이지.

소녀 : 괜찮아요. 옆에 할아버지 있잖아요. 
         그보다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노인 : 내 말? 한 번 맞춰봐라. 어떤 말이 내가 기다리는 말 같은지.
소녀 : 저 말 아니에요? 생긴 게 꼭 치타 같아서 진짜 잘 달릴 것 같아요.
노인 : 저 말은 요즘 유행하는 말이야. 
         저렇게 생긴 말들이 단거리에 아주 강하지. 
         근데 저런 말에는 베팅하는 게 아니야. 
소녀 : 왜요?
노인 : 왜긴. 저런 말들은 너무 빨리 지쳐버리거든. 
         말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자기 멋대로 가버리는 거야. 
         경마장은 단순히 돈 벌려고 오는 곳이 아니거든. 
소녀 : 그럼, 뭐 하러 오는 곳인데요?
노인 : 말이 내 믿음에 부응하는 걸 기다리는 곳이지. 
소녀 : 뭔지 알 거 같아요. 엄마도 영화 보면서 가끔 그렇게 중얼거리거든요. 
노인 : 영화는 경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 
소녀 : 왜요. 할머니도 영화 좋아했잖아요.
노인 : 그럼, 말 나온 김에 다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 
         안 그래도 너희 할머니가 영화 보고 싶다고 그렇게 성질부렸는데. 


사이


소녀 : 근데 할아버지 영화 싫어하잖아요. 엄마가 할아버지는 영화 싫어한다 그랬어요.
노인 : 무슨 소리야. 내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특히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 


사이

노인 : 왜 말이 없어? 가기 싫어?
소녀 : 저 주말에 데이트 가야 해요. 
노인 : 데이트? 누구랑. 경마장에 같이 왔다는 그 친구? 둘이 설마 커플이야?
소녀 : 커플은 아니고요. 제가 좋아해요. 근데 그 바보는 제가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노인 : 얼마나 바보길래 이렇게 귀여운 애가 자길 좋아하는지도 몰라? 
         나중에 한 번 데려와라. 어떤 녀석인지 낯짝 한번 보자. 
         아니지. 지금 여기 있다는 거잖아? 그 녀석 지금 데려와 봐라.
소녀 : 안 돼요. 걔 지금 똥 싸고 있어요. 
         그보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시인이라고 했었죠? 
노인 : 내가? 누가 그래? 내가 시인이었다고. 
소녀 : 엄마가 그랬어요. 할아버지 젊었을 때 시인이었다고. 
노인 : 시인은 무슨. 그냥 말장난 좀 한 거 가지고. 
소녀 : 할아버지는 왜 시를 쓰셨어요? 
노인 : 말장난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야. 
         말장난이 있고 그다음에 이유가 생기는 거지. 
소녀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노인 : 무슨 말이긴. 그냥 야생말이지. 
         (목을 가다듬더니) 야생말은 달린다. 세월도 달린다. 
         말이 달리니까 내 마음은 두근두근.
         두근두근. 새근새근. 고놈 참 잘도 잔다.
         우리 아이 자는 소리 어느 새가 물고 갔나.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 웃는 소녀. 

노인 : 뭐가 그렇게 웃겨?
소녀 : 그거 할아버지가 쓴 시예요?
노인 : 그건 아니고.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시인이 쓴 시란다.
         옛날에 무척 유명했던 시인인데 너무 옛날이라 이름이 기억 안 나는구나. 
소녀 : 진짜 시인이 쓴 시 맞아요? 못 썼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는데. 
노인 : 니가 시를 잘 몰라서 그래. 이거 엄청 잘 쓴 시야. 
소녀 :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잘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감탄이 나와야 잘 쓴 시죠. 


사이. 


노인 : 근데 넌 저 상자로 뭘 만들고 있던 거냐.
소녀 : 파르테논 신전이요. 어때요? 완전 진짜 같죠.
        노인, 소녀가 쌓아 올렸던 건물을 달려가 무너뜨린다. 
소녀 : 할아버지! 제가 열심히 만든 건데 부수시면 어떡해요!
노인 : 할아비가 시는 잘 아는데 건축은 잘 모르거든? 
         근데 저 건물이 파르테논 신전이 아닌 건 잘 알겠다. 
         저건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말할 수 없어.
소녀 : 시답지 않은 말 좀 하지 말고 다시 쌓는 거나 도와줘요. 
노인 : 살면서 말로 실수할 때, 그걸 주워 담는 법도 알아야지. 


노인, 밖으로 나간다.
소녀는 노인이 무대 밖으로 나간 것도 모르고 상자 쌓는 것에 집중한다. 


소녀 : 근데 할아버지, 저 할 말 있는데...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없어 당황하는 소녀. 


소녀 : 할아버지! 할아버지! 


소녀, 무대 밖으로 나간다. 


3막 


가을, 눈이 내리듯 은행잎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아이는 자신이 동상이 된 듯 미동 없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따라 하고 있다. 
소녀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소녀, 아이 주위를 맴돌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이와 함께 셀카를 찍는다. 
찰칵. 찰칵. 찰칵. 

아이 : (자세를 풀며) 사진 찍히는 건 정말 질색이야. 
소녀 : 언제부터 계셨어요?
아이 : 갑자기 왜 존댓말이야?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그나저나, 밥은?
소녀 : 지금이 몇 신데 밥 타령이냐? 니 없는 동안 내가 다 먹었다. 
아이 : 뭐? 왜 나 빼고 먹어! 
소녀 : 내 맘이다. 왜! 그보다 이 경마장은 왜 경기 시작을 안 해?
아이 : 말은 니가 보고 싶을 때 달리지 않아. 자기가 달리고 싶을 때만 달리지.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빨리 집에 좀 가.
소녀 : 싫어. 나도 경기 보고 갈 거야. 
아이 : 빨리 가라니까? 너 있으면 오던 말도 안 온다고. 
소녀 : 뭐래. 말은 자기들 마음대로 온다며.
아이 : 넌 그 말을 진짜 믿냐? 
소녀 : 됐고. 나 이번에 연극 올리는데 연습이나 도와줘. 
아이 : 니가 연극도 했어? 넌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런 걸 하냐.
소녀 : 뭐래. 너야말로 나한테 관심도 없잖아. 됐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이 : 까탈스럽긴. 알겠어. 도와주면 되잖아. 도와주면. 뭐 하면 되는데?
소녀 : (희곡을 주며) 자, 넌 노인 역할이야. 
아이 : 노인 말고 멋있는 주인공 없어? 멋없게 노인이 뭐야. 노인이. 
소녀 : 여기선 노인이 멋있는 주인공이야. 그러니까 빨리 저기로 가. 


아이는 투덜거리며 소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소녀 : 할아버지.


사이


소녀 : 할아버지! 
아이 : 불렀어?
소녀 : (한숨을 쉬며) 역시 엄마 말이 맞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지금 병원에 가야 해요.
아이 : 나 말하는 거냐? 갑자기 병원은 왜? 
소녀 : 엄마가 그러는데 할아버지 치매래요. 


사이


아이 : 고맙다. 덕분에 이게 현실인 걸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 저리 가서 놀아라. 
소녀 : 할아버지, 이건 농담이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렸어요. 
         방금 제가 부르는 것도 기억 못 하셨잖아요. 
아이 : 그건 너가 부르는 걸 못 들은 거잖아. 
소녀 : 엄마가 의사 선생님이랑 상담했는데 의사 선생님도 할아버지가 치매 같다고 했어요.
아이 : 그래? 그럼, 너는 내가 치매 같아? 
소녀 :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엄마랑 의사 선생님이 그랬으니까 맞는 거 같아요.
아이 : 난 치매가 아니야. 그냥 기억력이 안 좋은 거지.
소녀 : 할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이


아이 : 아무튼 난 치매가 아니야.
         넌 내가 병원 가는 게 무서워서 거짓말이나 하는 겁쟁이로 보여?
소녀 : 그건 아닌데 오늘 병원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어요. 
아이 : 나 치매 아니라니까! 


사이


소녀 : 야, 그거 여기 없는 대사잖아. 
아이 : 이 희곡 완전 쓰레기네. 
소녀 : 뭐래. 이거 엄청 유명한 작가가 쓴 건데. 
아이 : 내 생각엔 노인 빼고 싹 다 치매야. 
         노인은 치매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꾸 노인을 치매라고 부르잖아.
소녀 : 할아버지는 치매가 맞아. 결말을 보면...
아이 : 작가가 치매라고 쓰면 다 치매야? 이 할아버지가 아니라잖아. 
         본인이 아니라는데 왜 자기들 멋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거야. 
소녀 : 가족들도 할아버지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사이


아이 : 넌 거짓말 하는 게 재밌지? 이 거짓말쟁이야.
소녀 : 뭐래. 내가 언제 거짓말했어!
아이 : 몰라. 나 그냥 말 보러 갈래.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


아이, 무대 밖으로 나간다. 
소녀, 차마 아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아이를 바라본다. 



4막 


겨울, 눈이 벚꽃처럼 떨어진다.
노인, 스크린 앞에서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스크린으로 경기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말들이 보인다. 
소녀,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는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스크린을 응시한다.


노인 : 저기 보렴.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는 말이 보이기 시작했어. 
소녀 : 어디요?
노인 : 저 스크린 속에 있는데 안 보여?
소녀 : 잘 안 보이는데요. 
노인 : 조금만 더 기다려 보렴. 그럼, 어느 순간 보이기 시작할 거야. 
소녀 : 할아버지. 전 말을 좋아하긴 하지만 여긴 말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답답해져요. 
         어떤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이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을 기다리다간 진짜 숨넘어가겠다고요.


사이


소녀 : 할아버지! 듣고 계세요? 
노인 : 어젠가 그저께 내가 경마장에서 경주하는 꿈을 꿨어. 
         묘했던 건 내 어깨 위에 나랑 똑 닮은 놈이 앉아 있었다는 거야.
         그놈은 나를 말처럼 거칠게 다뤘지.
         그놈은 채찍으로 날 때리고 다리로 목을 조르면서 
         어떻게든 내가 뛰도록 만들었어. 
         꼭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말이야.
         경기가 시작된 뒤로 줄곧 달리기만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내가 달리고 있는지 서 있는지 분간이 안 될 때쯤이었나. 
         옆을 보니 말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 
         나는 그 말한테 말을 걸었어. 입을 아주 크게 벌렸지. 
         그러니까 꿈에서 깨버리더라. 옷은 식은땀에 홀딱 젖어있었고. 
         외로웠어. 그 녀석 때문에. 




긴 사이




노인 : 시원하구나. 바람이 부나? 
소녀 : 할아버지. 할아버지 옆엔 제가 있어요.
         그리고 (짧은 사이) 제가 있어요. 
노인 : 너도 내가 싫지?


사이


소녀 : 갑자기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할아버지를 왜 싫어해요.
노인 : 나 치매 아니다. 정말로. 


사이.


소녀 : 그럼요. 할아버지가 왜 치매예요. 할아버지 치매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치매면 말을 보지도 못했겠죠. 
         지금도 경마장이 아니라 병원에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제 뿔을 좀 보세요. 
         사람들은 이걸 혹이라고 부르지만 전 이게 뿔이란 걸 알고 있어요.
노인 : 그래. 뿔이 아주 매끈매끈하구나. 꼭 피부처럼 말이야. 
         근데 병원에 비하면 경마장은 아주 저렴하단다. 
소녀 :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치매가 아니에요. 정말로요. 
노인 : 거짓말을 참 예쁘게 하는구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예쁜 걸지도 모르겠지만.
소녀 : 제 말을 믿지도 않을 거면 왜 저한테 치매가 아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노인 : 우리 게임 하나 할까? 
        게임에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물어보는 말에 거짓 없이 답해주는 거야. 
소녀 : 좋아요. 하지만 제가 이기면 할아버지는 저한테 용돈을 주셔야 할 거예요.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저한테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노인 : 그래. 내가 든든하게 챙겨주마. 
소녀 : 게임은 뭐로 하실래요?
노인 : 끝말잇기 어때?
소녀 : 좋아요. 제가 먼저 할게요. 음... 경마.
노인 : 마, 마음.
소녀 : 음, 음악.
노인 : 악, 악사.
소녀 : 사, 사랑.
노인 : 랑, 랑... 앙으로 바꿔도 되나?
소녀 : 편한 대로요.
노인 : 앙심.
소녀 : 심, 심해.
노인 : 해, 해 질 녘.
소녀 : 녘....녘... 녘...


(사이) 


노인 : 역시 내가 이겼네.
소녀 : 취소. 취소. 다른 게임 해요. 우리. 이번 건 연습 게임이라 치고요. 
         우리 노래 불러요. 노래. 
노인 : 노래를 부르자고? 여기서? 
소녀 : 싫으면 하지 마세요. 저야 안 하면 그만이니까. 
노인 : 아니, 한다고 쳐도 그걸로 어떻게 승패를 정하자는 거야? 
소녀 :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되죠. 
노인 : 여기 사람이 어디 있어? 내 눈엔 말밖에 안 보이는데.
소녀 : 말도 보고 들을 줄 알아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들을 수도 있어요. 
노인 : 그래. 할아비가 졌다. 대신 너부터 불러라. 얼마나 잘 부르는지 들어나 보자. 
소녀 : 좋아요. 듣고 놀라지나 마세요. 


소녀,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소녀 : 어때요? 진짜 잘 부르죠! 
노인 : 그래. 잘 부르는구나. 근데 그 노래 실력은 누구한테 물려받았을 거 같니. 


노인,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터져 나오는 함성. 


소녀 : 할아버지! 왜 이렇게 잘 부르세요? 완전 가수 같아요. 
노인 : 할아버지가 왕년에 가수로 활동했던 거 얘기 안 했나? 
소녀 : 진짜요? 그럼, 할아버지는 시도 쓰시고 노래도 하셨던 거예요? 
노인 : 시? 내가 시를 언제 썼어. 난 노래밖에 부를 줄 몰라. 


사이


노인 : 왜 말이 없어? 내 노래가 그렇게 굉장했어?
소녀 : 완전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 노래가 제 뿔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바보 같은 꿈이요. 
노인 : 할아버지도 말을 보고 있으면 그런 기분이 든단다.
         달리는 말 앞에 서 있으면 우리는 한없이 초라해지지.
         하지만 말 위에 타 있는 인간을 보면 못돼 처먹은 우월감을 느끼기도 해. 
소녀 : 할아버지, 경기장에 있던 말들이 전부 사라졌어요.
노인 : 우리가 노는 사이에 쉬러 간 것 같구나. 
소녀 : 경기가 끝난 거예요?
노인 : 천만에. 경기는 아직 멀었어.
         그보다 화장실부터 가야겠다. 너무 오래 참은 거 같아.
소녀 : 가기 전에 물어보고 가요. 할아버지. 
노인 : 뭘 물어? 니가 껌도 아니고.


노인, 호탕하게 웃는다.
소녀, 웃지 않는다.


소녀 : 할아버지. 저도 화장실 갈래요. 
노인 : 난 여자 화장실 어디인지 모르는데? 
소녀 : 괜찮아요. 같이 가요. 


소녀와 노인이 함께 무대 밖으로 나간다.


5막



다시 봄.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룬 채 서 있다. 
소녀는 노인을, 노인은 아이를, 아이는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 : 경기 끝나면 뭐 할 거야?
노인 : 뭘 하긴. 다음 경기 기다려야지. 
소녀 : 집에 안 가?
노인 : 니가 내 엄마냐? 알아서 할게. 
소녀 : 나 이제 여기 못 와. 오늘이 마지막이야.


사이


소녀 : 야! 듣고 있어?
아이 : 듣고 있어. 왜 못 오는데? 엄마한테 여기 오는 거 들켰어?


사이.


소녀 : 그게 아니라 나 입원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이 뿔 안에 거대한 혹이 있대. 
         근데 혹이 뿔보다 커지면 바보가 될 수 있나 봐.
         그래서 혹이 사라질 때까지 병원에서 살아야 할 거 같아. 
아이 : 근데 혹이 뿔보다 커질 수 있나?


사이


노인 : 뭐, 그래도 경마장보단 병원이 좋지. 
         여긴 말똥 냄새랑 도박 중독자들로 가득하니까. 
         애초에 넌 여기 있을 사람도 아니고.
소녀 : 하지만 나도 말 좋아하는데. 
노인 : 왜? 
소녀 : 잘 모르겠어. 그래서 좋아. 보고 있으면 심장이 막 두근거리거든.
노인 : 말발굽 소리랑 헷갈린 거야. 그러니까 뿔이 사라져도 여기 오지 마. 
소녀 : 왜? (짧은 사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노인 : 그럼 있지. 없겠냐? 
소녀 : 누군데? 예뻐? 귀여워? 아니면...
노인 : 웃겨.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와. 
소녀 : 웃겨서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좋아해서 웃긴 거야?
노인 : 그걸 꼭 알아야 하나? 웃기면 그걸로 됐지. 
         넌 꼭 이상한 데 꽂혀서 사람 귀찮게 굴더라. 
소녀 : 넌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노인 :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결혼부터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넌 그게 왜 궁금한데?
소녀 : (짧은 사이) 난 우리 할아버지가 엄청 못된 사람인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너처럼 경마장을 좋아했는데 얼마나 좋아했냐면 
         할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매일 경마장에 갔거든. 
         근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경마장에 갔다는 걸 알더니 배를 잡고 깔깔 웃었어.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럴 거란 걸 알고 있었대. 
노인 : 어떻게?
소녀 : 그래서 좋아했대. 유약해서.
노인 : 바보 같네. (짧은 사이) 미안.


사이


소녀 : 나는 할아버지가 겁이 많은 사람인 걸 최근에 알았어. 
         우리 할아버지는 말을 보는 대신 뱉을 말을 삼키시거든. 
         요즘엔 당신 이름도 종종 까먹으시는 것 같아. 
아이 :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사이


아이 : 우리 사진 찍을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소녀 : 정말? 너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 
아이 : 괜찮아.
소녀 : 그럼, 사진 말고 영상 찍어도 돼?
아이 : 마음대로. 근데 뭘 찍으려고?


소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노인을 찍기 시작한다. 
스크린에 노인의 얼굴이 영사된다.


소녀 : 난 있지? 나중에 영화감독이 될 거야. 
아이 : 왜?
소녀 : 사람들이 평소에 못 보던 걸 보여주고 싶어서. 너 영화 좋아해? 
아이 : 좋아하지. 특히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해. 
소녀 : (짧은 사이) 우리 가족도 그 영화 좋아하는데. 
아이 : 진짜? 나중에 너희 엄마한테 꼭 말해줘. 나도 당나귀 나오는 그 영화 좋아한다고. 
         그럼, 너희 엄마가 날 좀 괜찮게 보지 않을까?
소녀 : 당연하지! 우리 엄마가 무척 좋아할 것 같은데? 


사이


아이 : 지금 뭐 찍고 있는 거야?
소녀 : 비밀. 나중에 내가 보고 싶어지면 그때 확인해. 
         혹시 알아? 
         지금은 안 보이던 게 그때는 보일지도 모르잖아.
아이 : 난 유령 같은 거 안 믿는데.
소녀 : 넌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쩔 거야?
아이 : 글쎄. 나도 경마장에 가지 않을까? 
소녀 : 왜?
아이 : 말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 안 드니까. 마치 내가 말이 된 것처럼.
소녀 : 가족들이 널 병원에 보내려 하면 어쩔 거야?
아이 : 그럼, 말을 타고 도망쳐야지. 
소녀 : 어디로?
아이 : 글쎄. 난 그냥 말을 타고 싶어. 진짜 그게 다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소녀 : 가족들이 걱정할 텐데. 
아이 : 진짜 걱정하면 가족들도 말을 타고 쫓아오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소녀 : 난 말을 탈 줄 몰라서 잘 모르겠어.
아이 : 아니야. 우리 저번에 같이 탄 적 있잖아. 기억 안 나?


사이


소녀 : 미안. 기억이 안 나. 
아이 : 아닌데. 분명 같이 탄 적 있는데. 
소녀 : 내 생각엔 꿈이랑 착각한 거 같아. 난 말에 타본 적 없어.
아이 : 그럼, 넌 말에 타볼 생각 있어?
소녀 : 모르겠어. 보는 건 좋은데 타는 건 좀 무서울 거 같아.


사이


아이 : 알겠어. 집에 가. 이제. 
소녀 : 진짜 가?
아이 : 어. 


소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스크린이 검게 물든다. 


소녀 : 나 진짜 간다? 
아이 : 빨리 가. 
소녀 : 오늘은 진짜 경기 끝나고 가면 안 돼? 이제 영원히 못 오잖아.
아이 : 내가 말했잖아. 말은 우리가 원할 때 달리지 않는다고. 
         니가 떠나면 그때 경기가 시작될 거야. 
소녀 : 그럼, 나한테 할 말 없어? 진짜 마지막이잖아. 우리.


사이


노인 : 고마웠어. 같이 있어 줘서. 
소녀 : 아니야. 내가 좋아서 있던 건데 뭘.
노인 :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사이


소녀 : 미안했어. 
노인 : 뭐가? 
소녀 : 말해주지 못해서.
노인 : 뭘 말하지 못했는데?
소녀 : 말할 수 없어.
노인 : 마지막인데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봐. 난 괜찮으니까.


사이


소녀 : 사랑해.


짧은 사이


아이, 호탕하게 웃는다. 노인은 웃지 않고 아이를 바라본다. 


소녀 : 왜 웃어?
아이 : 미안해. 근데 니가 너무 웃긴 걸 어떡해.
소녀 : 뭐가 웃겨? 넌 내가 사랑한다는 말이 웃겨?
아이 : 아니, 넌 어떻게 끝까지 속일 생각만 하냐. 
소녀 : 됐어. 나 진짜 갈래.
아이 : 잘 가. 갈 때 말 타고 가는 거 잊지 마. 백마 탄 공주님처럼 말이야. 


소녀, 아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진다.
스크린에서 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말들이 출발선 앞에 선다. 탕!
경주가 시작되자 말들이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소녀,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본다. 


소녀 : 이 바보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냐!


말발굽 소리가 어찌나 큰지 소녀의 목소리는 아이에게 미처 가닿지 못한다. 
아이, 말발굽 박자에 맞춰 춤을 춘다. 


소녀 : 야! 들려? 내가 너 사랑한다고! 지금도 엄청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빨리 말에 타라고 이 바보야!


아이는 스크린 속 말을 보며 격렬하게 춤을 춘다. 
더 빠르게, 더 압도적인 속도를 자랑하며 말은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의 춤도 말의 속도만큼이나 격렬하고 화려해진다. 
노인은 뒤늦게 아이의 춤사위를 따라 한다. 
그러나 말의 속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몸을 덩실덩실 휘날린다. 
소녀는 목청껏 무언가를 말하지만, 그 말은 더 이상 들리질 않는다.
고요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연하다. 
오직 말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