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위해 말타기
1막
봄, 벚꽃이 비 오듯 떨어진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아이가.
여자는 멀리서 아이의 춤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다그닥 다그닥.
춤을 멈춘다. 아이가.
여자는 춤을 멈춘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몸을 돌려 서로를 등진 채로 자리에 앉는다.
아이 : 무슨 일이야? 주말에 경마장까지 따라오고.
여자 : 할 말이 있어.
아이 : 뭔데?
여자 : 말할 수 없어.
아이 : 말도 못 할 거면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
여자 : 그냥. 심심해서.
아이 : 또 거짓말하네. 됐으니까 빨리 집에 가. 여기 있다가 괜히 어른들한테 혼나지 말고.
여자 : 싫어. 어디로 나가는지 모른단 말이야.
아이 : 그럼 너도 배팅이나 해. 너는 연승으로 하는 게 좋겠다.
여자 : 싫어. 난 도박 같은 거 안 해.
아이 : 경마가 왜 도박이야? 이건 엄연한 스포츠야. 말과 인간이 합심해서 만드는 속도의 예술이지.
여자 : 됐어. 난 그냥 보기만 할래.
아이 : 시시하긴. 니가 그러니까 애들한테 맞고 다니는 거야. 머리에 혹 난 것 좀 봐.
여자 : 이거 혹 아니고 뿔이거든. 바보야.
아이 : 니가 혹부리 영감이냐? 그게 어떻게 뿔이야.
여자 : 흥. 믿거나 말거나. 니 맘대로 해.
사이
여자 : 니가 응원하는 말은 무슨 말이야?
아이 : 안 알려줄 건데? 거짓말쟁이한테 알려줄 말은 없어.
여자 : 야, 근데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없어.
아이 : 뭐래. 너 또 거짓말하고 있잖아. 넌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하면 거짓말하는 것도 모르냐?
여자 : 됐어. 알려주기 싫으면 알려주지 마.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흰색 벽면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이 : 그림은 뭐 하러 그려?
여자 : 알아서 뭐 하게? 넌 니가 좋아하는 말이나 열심히 봐. 난 여기서 그림이나 그릴 테니까.
아이 : 난 너처럼 애 같은 애는 질색이야.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 : 야! 갑자기 어디가?
아이 : 알아서 뭐 하게? (여자의 표정을 힐끔 보더니) 화장실.
여자 : 같이 갈까?
아이 : 됐어. 내가 애냐?
아이, 밖으로 나간다. 여자, 혼자 남는다.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한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아이가 무대 위로 돌아온다.
아이 : 배 안 고프냐?
여자 : 그렇지 않아도 아빠가 간식 사 먹으라고 용돈 줬는데. 이걸로 뭐 사 먹을까?
아이 : 여기는 시켜 먹어야 해.
여자 : 주변에 먹을 데가 없나?
아이 : 없지. 요즘은 경마 보는 사람 많이 없으니까.
여자 : 근데 지금은 왜 많아?
아이 : 쟤네는 사람이 아니야.
여자 : 그럼 뭔데?
아이 : 뭐긴 뭐야. 말이지.
여자 : 거짓말.
아이 : 조랑말?
여자 : 난 얼룩말 할래.
여자, 말 흉내를 낸다.
여자가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아이도 여자를 따라 말 흉내를 낸다.
말 흉내를 내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두 사람.
아이 : 뛰어다니니까 배고픈데. 뭐 사 먹을까?
여자 : 난 됐으니까 혼자 먹어. 나는 여기서 그림이나 마저 그릴래.
아이 : 그림은 집에 가서 그려. 경마장에 왔으면 말을 봐야지 그림을 보면 어떡해?
여자는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를 이어 말의 형상으로 바꿔나간다.
어느새 벽면에 말 한 마리가 완성된다.
여자 : 이러면 불만 없지? 난 말 그림 그릴래.
갑자기 아이가 여자 손에 있는 크레파스를 뺏더니 그림에 낙서한다.
말이 점차 본래의 형상을 잃어간다.
아이 : 이젠 말이 아니라 그림 같지?
여자 :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 넌 경마장까지 와서 말장난하고 싶냐?
아이 : 그림은 니가 먼저 그렸잖아. 같이 경기 보자니까.
여자 : 그럼, 니가 응원하는 말이 뭔지 알려줘. 그래야 너랑 그 말을 기다릴 거 아니야.
아이 : 됐으니까 집에 가. 너랑 있으면 정신 사나워서 말에 집중을 못 하겠어.
여자 : 싫어.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아이 : 빨리 가라니까?
여자 : 안 돼. 지금 가면 아빠한테 너랑 있던 거 들켜.
아이 : 너희 아빠는 아직도 나 싫어해? 나 진짜 이상한 애 아닌데.
여자 : 알아. 근데 아빠는 그냥. (짧은 사이) 나도 잘 모르겠어.
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 : 야! 또 어디가!
아이 : 화장실!
여자 : (짧은 사이) 혼자 갈 수 있어?
아이 : 내가 넌 줄 아냐?
여자 : 야, 잠깐만.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아이, 밖으로 나간다.
여자 : 나... (뒤를 돌아보더니)
사이
여자, 천천히 뒤돌아 마저 그림을 그린다.
2막
여름, 빗소리가 단풍 떨어지듯 잔잔히 깔린다.
여자는 잔뜩 어지럽혀진 상자 더미들을 차곡차곡 위를 향해 쌓아 올리고 있다.
무대 안으로 들어온다. 노인이.
노인 : 위험하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여자 : 보면 몰라? 건물 짓고 있잖아.
노인 : (여자의 귀를 잡아당기며) 누가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래?
여자 : 죄송해요. 할아버지. 친구인 줄 알았어요.
노인 : 친구? 친구랑 경마장엔 왜 들어왔어? 이 칙칙한 곳에 뭐 볼 게 있다고.
여자 : 말 있잖아요. 전 말 좋아하거든요.
노인 : 됐으니까 빨리 집에나 가. 애들은 이런 데 오는 거 아니야. 경마장은 정신머리 없는 환자들이나 와서 시시덕거리는 곳이지.
여자 : 괜찮아요. 옆에 할아버지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노인 : 내 말? 한 번 맞춰봐라. 어떤 말이 내가 기다리는 말 같은지.
여자 : 저 말 아니에요? 생긴 게 꼭 치타 같아서 진짜 잘 달릴 것 같아요.
노인 : 저 말은 요즘 유행하는 말이야. 저렇게 생긴 말들이 단거리에 아주 강하지. 근데 저런 말에는 배팅하는 게 아니야.
여자 : 왜요?
노인 : 왜긴. 저런 말들은 너무 빨리 지쳐버리거든. 말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자기 멋대로 가버리는 거야.
경마장은 단순히 돈 벌려고 오는 곳이 아니에요.
여자 : 그럼 뭐 하러 오는 곳인데요?
노인 : 말이 내 믿음에 부응하는 걸 보러 오는 곳이지.
여자 : 뭔지 알 거 같아요. 아빠도 영화 보러 갈 때 가끔 그러거든요.
노인 : 영화는 경마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지.
여자 : 왜요. 할머니도 영화 좋아했잖아요.
노인 : 옥순이가 영화를 좋아했나?
사이
여자 : 그럼요. 할머니 영화 좋아해요.
노인 : 그럼, 말 나온 김에 다 같이 영화나 보러 갈까? 너하고 진석이하고 옥순이까지.
사이
여자 : 근데 할아버지 영화 싫어하잖아요. 아빠가 할아버지는 영화 싫어한다 그랬는데.
노인 : 무슨 소리야. 내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특히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
사이
노인 : 왜 말이 없어? 가기 싫어?
여자 : 저 주말에 데이트 가야 해요.
노인 : 데이트? 누구랑. 경마장에 같이 왔다는 그 친구랑? 둘이 설마 커플이야?
여자 : 커플은 아니고요. 제가 좋아해요. 근데 그 바보는 제가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노인 : 얼마나 바보길래 이렇게 귀여운 애가 자길 좋아하는지도 몰라?
나중에 한 번 데려와라. 어떤 녀석인지 낯짝 한번 보자.
아니지. 지금 여기 있다는 거잖아? 그 녀석 지금 데려와 봐라.
여자 : 안 돼요. 걔 지금 똥 싸고 있어요. 그보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시인이라고 했었죠?
노인 : 시인은 무슨. 그냥 말장난 좀 한 거지.
여자 : 할아버지는 왜 시를 쓰셨어요?
노인 : 말장난은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야. 말장난이 있고 그다음에 이유가 생기는 거지.
여자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노인 : 무슨 말이긴. 그냥 야생말이지.
(목을 가다듬더니) 야생말은 달린다. 세월도 달린다.
말이 달리니까 내 마음도 두근두근.
두근두근. 새근새근. 고놈 참 잘도 잔다.
우리 아이 자는 소리 어느 새가 물고 갔나.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 웃는 여자.
노인 : 뭐가 그렇게 웃겨?
여자 : 그거 할아버지가 쓴 시예요?
노인 : 그건 아니고.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유명한 시인이 쓴 시일걸?
여자 : 진짜요? 의외네. 못 썼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는데.
노인 : 니가 시를 잘 몰라서 그래. 이거 엄청 잘 쓴 시야.
여자 :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감탄이 나와야 잘 쓴 시죠.
사이.
노인 : 근데 넌 저 상자로 뭘 만들고 있던 거냐.
여자 : 파르테논 신전이요. 어때요? 완전 진짜 같죠.
노인, 여자가 쌓아 올렸던 건물을 달려가 무너뜨린다.
여자 : 아니, 남이 열심히 만든 걸 함부로 부수면 어떡해요.
노인 : 할아비가 시는 잘 아는데 건축은 잘 모르거든? 근데 저 건물이 파르테논 신전이 아닌 건 잘 알겠다.
저건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말할 수 없어.
여자 : 시답지 않은 말 좀 하지 말고 다시 쌓는 거나 도와줘요.
노인 : 살면서 말로 실수할 때, 그걸 주워 담는 법도 알아야지.
노인, 밖으로 나간다.
여자는 노인이 무대 밖으로 나간 것도 모르고 상자 쌓는 것에 집중한다.
여자 : 할아버지, 저 할 말 있는데...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없어 당황하는 여자.
여자 : 할아버지! 할아버지!
여자, 밖으로 나간다.
3막
가을, 눈이 내리듯 은행잎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아이는 자신이 동상이 된 듯 미동 없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따라 하고 있다.
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온다.
여자, 아이 주위를 맴돌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이와 함께 셀카를 찍는다.
찰칵. 찰칵. 찰칵.
아이 : (자세를 풀며) 사진 찍히는 건 정말 질색이야.
내 영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것 같거든.
여자 : 언제부터 계셨어요?
아이 : 갑자기 왜 존댓말이야?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그나저나, 밥은?
여자 : 지금이 몇 신데 밥 타령이냐? 니 없는 동안 내가 다 먹었다.
아이 : 뭐? 왜 나 빼고 먹어!
여자 : 내 맘이다. 왜! 그보다 이 경마장은 왜 경기 시작을 안 해?
아이 : 말은 니가 보고 싶을 때 달리지 않아. 자기가 달리고 싶을 때만 달리지.
말의 미음 자도 모르는 어른들은 그래서 딱 질색이야.
멋이 없잖아. 멋이.
여자 : 제발 말 좀 가려서 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른들이 말주변 없다 그래.
아이 : 흥. 말주변 없다고 하는 어른들은 전부 말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말주변만 신경 쓰고 주변 말은 신경 쓰질 않는 거지.
그건 그렇고.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빨리 집에 좀 가.
여자 : 싫어. 나도 경기 보고 갈 거야.
아이 : 너 있으면 오던 말도 안 온다고.
여자 : 말은 자기들 마음대로 오는 거라며.
아이 : 그 말을 진짜 믿냐?
여자 : 됐고. 나 이번에 연극 올리는데 그거 연습이나 도와줘.
아이 : 니가 연극도 했어?
여자 : 됐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넌 나한테 관심도 없지?
아이 : 까탈스럽긴. 뭐 하면 되는데?
여자 : (희곡을 주며) 이거 받아. 넌 노인 대사를 읊으면 돼.
아이 : 노인 말고 멋있는 주인공은 없어?
여자 : 노인이 멋있는 주인공이야. 빨리 저기로 가기나 해.
아이는 투덜거리며 여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여자 : 할아버지.
아이 : 왜 부르니.
여자 : 할아버지는 병원에 가야 해요.
아이 : 병원? 병원은 갑자기 왜.
여자 : 아빠가 그러는데 할아버지 치매 같대요.
사이
아이 :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여자 :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병원에 안 가는 것보단 가는 게 좋겠죠.
아이 : 다들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근데 난 치매가 아니야.
그냥 기억력이 좋지 못한 거지.
여자 :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이
아이 : 아무튼 난 치매가 아니야.
넌 내가 병원 가는 게 무서워서 거짓말이나 하는 겁쟁이로 보이니?
여자 : 오늘 병원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어요.
아이 : 농담은 거기까지 하렴. 난 니 친구가 아니야.
여자 : 죄송해요. 할아버지.
여자가 아이에게서 등을 돌려 무대 밖으로 내려가려 한다.
아이 : 나 치매 아니라니까!
아이, 대본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뒤를 돌아 다시 무대로 복귀하는 여자.
여자 : 야, 뭐해. 그거 희곡에 없는 대사잖아.
아이 : 이 희곡은 쓰레기야.
여자 : 이거 엄청 유명한 작가가 쓴 건데.
아이 : 내 생각엔 노인 빼고 전부 치매 같아.
노인은 치매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꾸 노인을 치매라고 부르잖아.
여자 : 할아버지는 치매가 맞아. 희곡 뒤에 보면 의사가 진단하는 내용도 나오고...
아이 : 의사가 진단하면 다 치매야? 본인이 아니라잖아.
본인이 아니라는데 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거야.
여자 :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그들은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어.
아이 : 정말 할아버지를 사랑했다면 할아버지를 믿어줬겠지.
내가 할아버지 가족이라면 할아버지를 믿어줬을 거야.
여자 : 믿어주면 할아버지가 치매라는 사실이 변해?
아이 :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여자 : 그럼 뭐가 중요한데?
사이
여자 : 뭐가 중요하냐니까?
아이 : 넌 진짜 지독한 거짓말쟁이네.
여자 : 야, 거짓말은 너가 하고 있잖아.
아이 : 몰라. 나 그냥 말 보러 갈래. 너 이제 여기 오지 마.
아이, 밖으로 나간다.
여자, 차마 아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저 멀리 사라지는 아이를 바라본다.
4막
겨울, 눈이 벚꽃처럼 떨어진다.
노인, 스크린 앞에서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스크린으로 경기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말들이 보인다.
여자, 노인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는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스크린을 응시한다.
노인 : 저기 보렴.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는 말이 보이기 시작했어.
여자 : 어디요?
노인 : 저 스크린 속에 있는데 안 보여?
여자 : 잘 안 보이는데요.
노인 : 그럼, 조금 더 기다리렴. 그럼 점점 보이기 시작할 거야.
여자 : 또요? (짧은 사이)
할아버지. 전 말을 좋아하지만 경마장을 좋아하진 않아요.
여긴 말이 너무 많아서 어떤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말이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니까 빨리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말을 기다리다간 진짜 숨넘어가겠어요.
사이
여자 : 할아버지! 듣고 계세요?
노인 : 어젠가 그저께 내가 경마장에서 경주하는 꿈을 꿨어.
묘했던 건 내 어깨 위에 나랑 똑 닮은 놈이 앉아 있었다는 거야.
그놈은 나를 말처럼 거칠게 다뤘지.
외로웠어. 그 녀석 때문에.
그놈은 채찍으로 날 때리고 다리로 목을 조르면서
어떻게든 내가 뛰도록 만들었어.
꼭 마법에 걸린 것 같았지.
경기가 시작된 뒤로 줄곧 달리기만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내가 달리고 있는지 서 있는지 분간이 안 될 때쯤이었나.
옆을 보니 말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
나는 그 말한테 말을 걸었어. 입을 아주 크게 벌렸지.
그러니까 꿈에서 깨버리더라. 옷은 식은땀에 홀딱 젖어있었고.
긴 사이
노인 : 시원하구나. 바람이 부나?
여자 : 할아버지. 할아버지 옆엔 제가 있어요.
그리고 (짧은 사이) 제가 있어요.
노인 : 너도 내가 싫지? 귀찮고
사이
여자 : 갑자기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할아버지를 왜 싫어해요.
노인 : 나 치매 아니다. 정말로.
사이.
여자 : 그럼요. 할아버지가 왜 치매예요. 할아버지 치매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치매면 말을 보지도 못했죠.
지금도 경마장이 아니라 병원에 있을 거고요.
그리고 제 뿔을 좀 보세요.
사람들은 이걸 혹이라고 부르지만 전 이게 뿔이란 걸 알고 있어요.
노인 : 그래. 뿔이 아주 매끈매끈하구나. 꼭 피부처럼 말이야.
근데 그거 아니? 병원에 비하면 경마장은 아주 싸단다.
여자 :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치매가 아니에요. 정말로요.
노인 : 거짓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예쁜 걸지도 모르겠지만.
여자 : 아니, 할아버지.
제 말을 믿지도 않을 거면 왜 저한테 치매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
노인 : 우리 게임 하나 할까?
게임에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물어보는 말에 거짓 없이 답해주는 거야.
여자 : 좋아요. 하지만 제가 이기면 할아버지는 저한테 용돈도 주셔야 할 거예요.
할아버지가 하는 말은 저한테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노인 : 그래. 내가 든든하게 챙겨주마.
여자 : 게임은 뭐로 하실래요?
노인 : 끝말잇기 어때?
여자 : 좋아요. 제가 먼저 할게요. 음... 경마.
노인 : 마, 마음.
여자 : 음, 음악.
노인 : 악, 악사.
여자 : 사, 사랑.
노인 : 랑, 랑... 앙으로 바꿔도 되니?
여자 : 편한 대로요.
노인 : 앙심.
여자 : 심, 심해.
노인 : 해 질 녘.
여자 : 녘....녘... 녘...
(사이)
노인 : 역시 내가 이겼네.
여자 : 취소. 취소. 다른 게임 해요. 우리. 이번 건 연습 게임이라 치고요.
우리 노래 불러요. 노래.
노인 : 노래를 부르자고? 여기서?
여자 : 싫으면 하지 마세요. 저야 안 하면 그만이니까.
노인 : 아니, 한다고 쳐도 그걸로 어떻게 승패를 정하자는 거야?
여자 : 사람들한테 누가 더 잘 불렀나 물어봐야죠!
노인 : 여기 사람이 어디 있어? 내 눈엔 말밖에 안 보이는데.
여자 : 말도 보고 들을 줄 알아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잘 할 수도 있어요.
노인 : 그래. 할아비가 졌다. 대신 너부터 불러. 얼마나 잘 부르나 들어나 보자.
여자 : 좋아요. 놀라지나 마세요.
여자,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여자 : 어때요? 저 완전 잘 부르죠!
노인 : 그래. 꽤 잘 부르는구나. 근데 그 노래 실력을 누구한테 물려받았을 거 같니.
노인, 목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터져 나오는 함성.
여자 : 할아버지! 왜 이렇게 잘 부르세요? 완전 가수 같아요.
노인 : 할아버지가 왕년에 가수로 활동했었던 거 얘기 안 해줬나?
여자 : 그럼 할아버지는 시인도 하시고 가수도 하셨던 거예요?
노인 : 시인? 내가 시를 쓴 적 있던가? 나는 노래밖에 부를 줄 몰라.
사이
노인 : 왜 말이 없어? 내 노래가 너무 감명 깊었나?
여자 : 맞아요. 노래가 너무 인상 깊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요.
노래 가사가 제 영혼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거든요.
노인 : 나는 좋은 노래를 들을 때 달리는 말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단다.
달리는 말 앞에 서 있으면 나는 한없이 초라해지지.
하지만 말 위에 타 있는 인간을 보며 못 돼 처먹은 우월감을 느끼기도 해.
여자 : 할아버지, 근데 경기장에 왜 말이 하나도 없어요?
노인 : 우리가 말로 노는 사이에 편히 쉬러 간 것 같구나.
여자 : 경기가 끝난 거예요?
노인 : 천만에. 경기는 계속될 거다. 말과 돈만 있다면 말이야.
화장실에 가야겠다. 너무 오래 참은 거 같아.
여자 : 가기 전에 물어보고 가요. 할아버지. 저 집에 가야 해요.
노인 : 뭘 물어? 니가 껌도 아니고.
노인, 호탕하게 웃는다.
여자, 웃지 않는다.
여자 : 할아버지. 저도 그냥 화장실 갈래요.
노인 : 난 여자 화장실 어디인지 모르는데?
여자 : 괜찮아요. 같이 가요.
5막
다시 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자리에 앉는다.
여자 : 경기 끝나면 뭐 할 거야?
아이 : 뭘 하긴. 다음 경기 기다려야지.
여자 : 집에 안 가?
아이 : 니가 내 엄마냐? 알아서 할게.
여자 : 나 이제 여기 못 와. 오늘이 마지막이야.
사이
여자 : 야! 듣고 있어?
아이 : 듣고 있어. 왜 못 오는데? 니네 아빠가 나랑 놀지 말래?
사이.
여자 : 그게 아니라 나 입원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이 뿔 안에 거대한 혹이 있대.
근데 혹이 뿔보다 커지면 바보가 될 수 있나 봐.
그래서 혹이 사라질 때까지 병원에서 살아야 할 거 같아.
아이 : 근데 혹이 뿔보다 커질 수 있나?
사이
아이 : 뭐, 그래도 경마장보단 병원이 좋지.
여긴 말똥 냄새랑 도박 중독자들로 가득하니까.
애초에 넌 여기 있을 사람도 아니고.
여자 : 하지만 나도 말 좋아하는데.
아이 : 왜?
여자 : 잘 모르겠어. 그래서 좋아. 보고 있으면 심장 두근거리는 게 멈추질 않으니까.
아이 : 말발굽 소리랑 헷갈리는 거야. 그니까 뿔이 사라져도 여기 오지 마.
여자 : 왜? (짧은 사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이 : 그럼 있지. 없겠냐?
여자 : 누군데? 예뻐? 귀여워? 아니면...
아이 : 웃겨.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웃음이 나와.
여자 : 웃겨서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좋아해서 웃긴 거야?
아이 : 그걸 꼭 알아야 하나? 웃기면 그걸로 됐지.
넌 꼭 이상한 데 꽂혀서 사람 귀찮게 굴더라.
여자 : 넌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아이 : 아직 사귀지도 않았는데 결혼부터 생각하는 건 좀 그렇지.
근데 넌 그게 왜 궁금해?
여자 : (짧은 사이) 난 우리 할아버지가 엄청 못된 사람인 줄 알았어.
할아버지는 너처럼 경마장을 좋아했는데 얼마나 좋아했냐면
할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매일 경마장에 갔거든.
근데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경마장에 갔다는 걸 알더니 배를 잡고 깔깔 웃었어.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럴 거란 걸 알고 있었대.
아이 : 어떻게?
여자 : 그래서 좋아했대. 유약해서.
아이 : 바보 같네. (짧은 사이) 미안.
사이
여자 : 나는 할아버지가 겁이 많은 사람인 걸 최근에 알았어.
우리 할아버지는 말을 보는 대신 뱉을 말을 삼키시거든.
아이 : 요즘도 그러셔?
여자 : 요즘엔 당신 이름도 종종 까먹으시는 것 같아.
아이 : 가족들이 걱정하겠다.
사이
아이 : 나중에 뵙게 되면 인사드릴게.
여자 : 그래. 꼭 인사드려.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거야.
아이 : 우리 사진 찍을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여자 : 정말? 너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
아이 : 괜찮아. 니가 좋아하니까.
여자 : 그럼, 사진 말고 영상 찍어도 돼?
아이 : 마음대로. 근데 뭘 찍으려고?
여자,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이를 찍기 시작한다.
스크린에 아이의 얼굴이 영사된다.
여자 : 난 있지?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야.
아이 : 왜?
여자 : 사람들이 평소에 못 보던 걸 보여주고 싶어서. 너 영화 좋아해?
아이 : 좋아하지. 특히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해.
여자 : (짧은 사이) 우리 가족도 그 영화 좋아하는데.
아이 : 그래? 그럼 너희 가족은 엄청 좋은 사람들이겠다.
이 영화 좋아하는 사람 중에 멋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중에 너희 아빠한테 꼭 말해줘. 나도 당나귀 나오는 프랑스 영화 좋아한다고.
그럼 너희 아빠가 날 좀 괜찮게 보지 않을까?
여자 : 잘 모르겠어.
사이
아이 : 그보다 지금 뭐 찍고 있는 거야?
여자 : 비밀. 나중에 내가 보고 싶어지면 그때 확인해.
혹시 알아?
지금은 안 보이던 게 그때는 보일지도 모르잖아.
아이 : 난 유령 같은 거 안 믿는데.
여자 : 넌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쩔 거야?
아이 : 글쎄. 나도 경마장에 가지 않을까?
여자 : 왜?
아이 : 말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 안 드니까.
처음부터 기억 같은 게 없었던 것처럼.
여자 : 가족들이 널 병원에 보내려 하면?
아이 : 그럼, 말을 타고 도망칠래.
여자 : 어디로?
아이 : 글쎄. 잘 모르겠어. 그냥 말을 타고 계속 달리고 싶어.
내 모든 기억이 말에서 떨어질 때까지.
사이
아이 : 이제 집에 가.
여자 : 진짜 가?
아이 : 응.
여자,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스크린이 검게 물든다.
여자 : 나 진짜 간다?
아이 : 빨리 가. 경기 시작하면 배웅 못 해주니까.
여자 : 나도 경기 보고 가면 안 돼? 이제 영원히 못 오니까.
아이 : 내가 말했잖아. 말은 우리가 원할 때 달리지 않는다고.
니가 떠나면 그때 경기가 시작될 거야.
여자 : 그럼 나한테 할 말 없어? 마지막이잖아. 우리.
사이
아이 : 고마웠어. 같이 있어 줘서.
여자 : 아니야. 내가 좋아서 있던 건데 뭘.
아이 :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사이
여자 : 미안했어.
아이 : 뭐가?
여자 : 말해주지 못해서.
아이 : 뭘 말하지 못했는데?
여자 : 말할 수 없어.
아이 : 마지막인데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봐. 난 괜찮으니까.
사이
여자 : 나 너 좋아해. 그니까 나랑 도망치자.
사이
아이, 호탕하게 웃는다.
여자 : 왜 웃어?
아이 : 미안해. 근데 니가 너무 웃긴 걸 어떡해.
여자 : 뭐가 웃겨? 넌 내가 좋아한다는 말이 웃겨?
아이 : 아니, 넌 어떻게 끝까지 속일 생각만 하냐.
여자 : 됐어. 나 진짜 갈래.
아이 : 갈 때 말 타고 가지 그래? 백마 탄 공주님처럼 말이야.
여자, 아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진다.
스크린에서 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말들이 출발선 앞에 선다. 탕!
경주가 시작되고 말들이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질주한다.
여자,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본다.
여자 : 이 바보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냐!
말발굽 소리가 어찌나 큰지 여자의 목소리는 아이에게 미처 가닿지 못한다.
아이, 말 달리는 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
여자 : 야! 들려? 내가 너 좋아한다고! 지금도 엄청 좋아한다고!
그니까 빨리 말에 타라고! 바보야!
아이는 스크린 속 말을 보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더 빠르게, 더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말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고,
아이의 춤사위는 말의 속도와 무관하게 자기 몸을 휘날린다.
여자는 목청껏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지만 더 이상 그 말이 들리질 않고,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고요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연하다.
오직 말만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