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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과 익살의 상실
#1. 글쓰기가 몸의 경계를 그리는 일이라면, 이 몸은 누구의 몸인가? 오늘날, 우리는 편지를 쓸 때조차 AI의 도움을 받는다. AI가 쓴 글은 백화점 진열대에 올라가는 명품처럼 모난 곳 하나 없이 독자와의 성공적인 접속을 선물한다. AI가 쓴 글에는 빈 틈이 없다. 그런데 빈 틈 없는 몸은 인간의 몸이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성형 중독자의 몸,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네킹이다. AI가 쓴 글은 성형 사회가 선전하는 잘 빠진 몸에 가깝다. 자본주의 시대의 최고 악이 만질 수 없음이라더니 무의미를 참을 수 없던 인류는 이제 무의미 자체를 세계 바깥으로 내쫓기 시작한다.
접속과 접촉은 다르다. AI가 쓰는 글은 접속은 가능할지언정 접촉은 불가하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몸은 누구의 몸인가? AI는 읽기를 통해 맞닿은 피부가 진정 인간의 피부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인-공(人-空) 피부를 생성한다. 기존 글쓰기가 필자의 피부만 제공했다면, 오늘날의 글쓰기는 그 피부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몸의 물질성과 그것의 부재에 관한 문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애초에 자본주의 세계에서 몸은 만져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 위해 존재했다. 미디어를 통해 인지되는 몸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환영적이다. 부정조차 부정하는 이 미의 환영들은 변증되지 않고 표면 위로 미끄러지며 미를 끊임없이 생성한다. 우리는 다양한 몸이 아니라 다양한 아름다움만을 사유하고 있던 게 아닐까. 우리가 몸이라고 사유했던 것들은 실상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환영의 내부 논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름다움 바깥의 세계를 모른다. 아니, 설령 바깥이 없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의 사각지대를 본 적이 없으며 또 보려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아름다운 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도 언젠가부터 아름답지 않다고 말해지고 보여지는 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몸과 그들이 아는 아름다운 몸은 반드시 다른데도.
#2. 아름답지 않은 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체중 몸이다. 지방은 지정학적 위계 속에서 본래의 토착 권리을 박탈당한다. 내장 지방은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 절대 악과 다름이 없다. 내장 지방은 오직 비만이라는 병리적 문제의 원인으로서 제거되어야 할 몸이 된다. 이때, 비만 이미지는 다양한 몸을 순식간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축소하며 몸의 다양성을 동일성의 차원으로 축소시킨다. 몸의 다양성은 형태 이전의 상태로 구조화되는 신체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즉, 그것은 형태와 형태 사이에서 발생하는 힘의 위상학이자 관계 집합적 운동이다. 그래서 다양한 몸은 분화된 지방의 물리적 표지에 가깝다. 또한 다양한 몸은 지방이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반복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는 구조 속에 놓인다. 다양한 몸에 분포하는 지방은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외부 작용이 존재하지 않기에 지방 토착민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듯 말이다.
#3.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체셔 고양이의 익살을 살펴보자. 앨리스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체셔 고양이는 시도 때도 없이 웃는 얼굴로 그녀 앞에 나타난다. 능청스럽게 위기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알려주더니 웃으며 사라진다. 체셔 고양이는 왜 웃고 있는가? 웃음은 언제나 육체적 담론 안에 있다. 칸트는 웃음을 ‘기대라는 고정된 형태가 순식간에 무의미라는 형태의 상실로 이동하는 그 찰나에 발생하는 것’1)으로 보았다. 웃음은 몸과 몸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몸을 생성한다. 웃음은 하나의 몸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몸-없음을 폭로한다. 익살은 무의미한 몸을 의미 있는 몸으로, 의미 있는 몸을 무의미한 몸으로 재배치하는 위상학적 행위다. 그것은 육체에 존재하는 이미지-지정학을 마비시켜 모든 몸을 지방으로 재구성한다. 모든 곳이 지방인 몸은 의미가 미도착하는 몸,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지정학적 위계가 교란되는 웃기는 몸이다. AI가 즐비한 세계에는 익살이 존재하지 않는다. 익살은 타인보다 낮아질 용기를 가져야만 할 수 있는 무의미의 포용이다. 무의미를 참을 수 없는 세계는 익살이 불가능한 세계, 오직 거울을 볼 때만 웃는 것이 허용되는 나르시시스트의 세계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은 존재론의 한 양상으로서 특수한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보편적 특수성이 된다.
#4. 고유는 근본과 다르다. 근본이 존재론의 차원이라면, 고유는 존재론보다는 현상학에 가깝다. 그런데 현상학의 본질은 주체로부터의 이탈 불가능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그렇다면 몸의 고유성이란 실재와 언어, 타자와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시적 신비가 아닐까. 어떤 이가 쓰는 언어의 전체 집합은 해당 이의 지방 모양을 그린다. 그렇게 지방 모양의 굴곡을 따라 현상된 몸은 그 사람의 고유한 몸이자 정체성이 된다. 진정 몸과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이 구조적 진실이라면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보여지는 것 앞에서 멈춰서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멈춰 섬은 아름다움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아니었던가. 이제 몸을 사유할 때, 중요한 건 근본이 아니라 몸과 몸 사이에 존재하는 틈, 자유와 자연 사이에 마련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다. 아름다움이란 강요되는 게 아니라 요청되는 것, 들어갈 자리를 채우는 게 아닌 비우는 것이다. 비워진 곳 앞에서 텅 빔을 응시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익살의 잔여 운동, 급격한 운동 뒤에 발생하는 여진에 가깝다. 이 여진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으며 그 운동량은 정확히 측정될 수 없다.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가 익살이 그리는 불규칙적 규칙에 맞춰 춤을 춘다. 지방은 몸에 깃든 아름다움의 노스텔지어다. 지방의 지방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의 접면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아름다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5. 환 공포증은 흥미로운 육체적 사건이다. 환 공포증은 의학적 맥락에서 보면 공포증이 아니다. 그것은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모든 이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보편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 공포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흄의 당구공이 던진 질문은 이러하다.
“일직선 상에 놓여 있는 두 당구공이 부딪힐 때, 인간은 그것이 예측된 범위 하에서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는가?”
메이야수는 당구공의 궤적을 상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해체를 그린다고 말한다. 예측 가능한 궤도를 뛰어넘어 발생하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궤도가 우연성이라는 이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환 공포증으로 돌아가보자. 왜 하필 환 공포증은 네모가 아닌 환으로 구성된 채 발생하는가? 이 질문은 의학적으로 정확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착시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비롯되는 혐오 같은 것도 아닌 듯하다. 설령 이것이 미래에 설명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건 환 공포증이 왜 하필 원으로서 집단적으로 발생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미지의 감각이다. 인간은 상상력의 무력함을 표상하는 자연의 무한함 앞에서 거대한 공포를 느낀다. 칸트는 이성 이념과 그로 비롯되는 숭고의 감정을 통해 이 공포와 상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들에게 거대한 자연은 그저 다양한 몸이다. 체화된 자연은 이성 이념을 통해 우회되지 않고 물리적 파괴를 통해(다이어트 같은 신체적 파괴) 세계 바깥으로 추방된다. 환 공포증도 이와 비슷한 맥락 속에 놓인다. 환 공포증은 공포를 숭고로 승화시킬 이성의 역량을 압도한다. 이념이라는 관념은 물리적이고 경험적인 신체적 증상에 앞에서 좌절되기 때문이다. 자연을 극복할 시간을 주지 않는 이 미지의 감각은 경험해본 적 없는 사변적 시공간을 제공한다. 그곳은 도식화가 불가능한 비시간적 세계, 인식이 정지된 채 오로지 감각만 발생하는 지방의 공간이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난 아름다움은 바로 이 연소-중-지방, 즉 아름다움의 공집합에서 비롯된다. 환 공포증의 공포는 바로 이 공집합의 응시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건 공집합이 아닐 것이다. 실제적 차원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기묘함이란 과잉과 으스스함이란 결핍의 중첩이다. 공집합은 이 과잉과 결핍의 중첩 사이에서 하나-없음이라는 다수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빈 공간이다. 우리는 환 공포증을 통해 몸-없음을 경유하며 아름다움의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한다.
#6. 자본주의가 설파하는 몸은 아름답지 않다. 그 몸은 팔려야 한다는 목적에 맞춰 자유를 헌납한 맹목적 몸이다. 지방에는 맹목이 없어 언제나 여분의 자유가 존재한다. 우리가 지방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는 그것에 함유된 자유의 역량이 지성과 상상력의 유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연소될 지방이 존재하지 않는 몸을 보며 존경심을 느낀다. 숭고로부터 비롯되는 절대 악이 이제는 오만함이 아니라 방자함에서 온다. 몸은 물신과 접신하면서 끝내 유일신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유를 통해 자유의 역량을 완전히 제거한다. 자유를 다 토해낸 인간이 말한다. 나는 있다. 여기에. 몸. 그들은 언제나 여기 있다고 착각하며 저곳으로 갈 용기를 포기한다. 그러나 저곳은 사실 이곳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진정 밟을 수 없는 것은 저곳이 아니라 이곳이다. 용기 없는 자는 AI 뒤에 숨겨진 이곳을 볼 수 없어 언제나 저곳을 밟는다. 나르시시즘과 분열자가 동일시 되는 건 필연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타자를 보고 타자를 보며 얼굴 없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이곳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불타버린 지방의 곳간이다.
NOTES 각주
- 각주
1)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판단력 비판』, 아카넷, 37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