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뉴미디어

DD · 2026.07



<아날레마> 

 해당 작품은 실과 빛이라는 소박한 재료를 통해 관계의 우주를 그린다. 네 개의 프로젝터는 전시 공간의 중앙을 향해 빛을 뿜어낸다. 전시 공간 전반에 불규칙적으로 엉켜있는 실은 이 빛들과 부딪히며 삼차원 스크린 역할을 도맡아 예측 불가능한 입자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찰나의 현상만을 목격한다. 더군다나 현시되는 이미지 안에는 현시되지 못한 또 다른 이미지가 숨어있다. 이미지는 언제나 인간의 지각보다 거대하다. 세부는 전체보다 작지 않으며 전체는 세부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연이라는 사건은 어쩌면 비가시적인 역학관계가 우발적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즉, 인간과 세계 혹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역학관계로부터 우리는 얼마간 미래를 부여받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해당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숭고하다. <아날레마>는 비가시적 역학관계라는 인간 이념을 초월하는 자연의 거대함과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빛과 실이 자아내는 불규칙한 입자의 운동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자유가 존재함을 느낀다. 우연이 비가시적인 역학관계의 산물일지 모르지만, 그 역학관계엔 명백히 가시적인 인과관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시적인 인과관계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나의 행위가 다가올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나는 이 같은 사유, 자유에 관한 책임 속에서 칸트와의 안녕(만남과 작별)을 동시적으로 시도해본다.

 <아날레마>의 음악은 빛이 가장 강렬할 때와 빛이 사라지는 순간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진동한다. 내 앞에 현시된 그것은 언제나 절반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절반의 말하기 속에서 존재의 함성, 끝없이 꿈틀거리는 타자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그 심장 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관객은 빛과 실이 교차하는 곳에서 들려오는 그 심장소리를 끊임없이 응시한다. 




“큰일났어. 어떻게 해도 지나갈 수 없는 숲이야.” 
신이인,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어린 사랑의 시」 부분


<‘너’로 댄스 : 댄스 가챠 머신> 

 기술에 대한 사유 이전에 기술을 사용하고 폐기하기 바쁜 현시대에 이 작품은 왜 AI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유가 돋보였다. 해당 작품은 프롬프트로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입력하면 AI가 그와 관련된 안무를 창작해준다. 관객은 AI가 창작한 안무를 따라 추며 자신이 작성한 프롬프트 속 감정을 이해하고 감각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AI는 단순 안무가의 대리 수행자일 뿐인가? 

 이 작품의 안무는 안무가의 안무를 모션 캡쳐와 자사가 직접 개발한 AI를 결합해서 산출된다. 이때,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안무는 안무가가 창작한 안무에서 동떨어진 안무가 될 수는 없다. 가령, 행복과 관련된 안무 A, 슬픔과 관련된 안무 B, 두려움과 관련된 안무 C...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관객은 프롬프트에 “I lost my wallet.”을 작성하면 AI는 해당 프롬프트의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 적합한 감정을 분석해 그에 맞는 안무를 관객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I lost my wallet. But I don't mind because it wasn't expensive.”를 작성했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문장에서 산출되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 문장의 감정은 슬픔과 안도 사이에 있는 듯하다. 그렇게 되면 AI는 슬픔과 관련된 안무 B와 안도와 관련된 안무 X를 결합하게 된다. AI는 아직 인간의 관절을 온전히 이해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물론, 이 작품의 탁월함은 과학의 진보를 경험하는 것에 있지 않지만 말이다. 

 한국인이 프롬프트에 “I was a car.”를 입력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기기에 입력된 함숫값은 “I was a car”이지만 한국인 관객에게 이 문장은 “나는 자동차였다”와 “나는 차였다” 식의 이중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통해 생성된 안무는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선물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자체로 넌센스다. 안무를 따라하는 관객의 감정은 끊임없이 “나는 자동차였다”와 “나는 차였다”라는 서로 다른 방향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이 작품은 “말하기”와 “말해진 것” 사이의 미끄러짐을 안무로 번역한다. “I’m happy”라는 정직한 문장을 입력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말해진 “I’m happy”와 “I’m happy”를 말하는 자 사이에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리비도 경제학이 존재한다. “I’m happy”의 언표 행위 주체는 말하기와 함께 사건 안으로 진입하며 무의식 내부의 다층적 욕망이 그리는 영토 위에 우뚝 서게 된다. 오이디푸스로 포섭되지 않는 무의식이 말하는 행복은 어떤 행복인가. 그것은 어느 영토의 어떤 코드가 산출하는 행복인가. 정보의 집대성으로 창조된 AI와 무의식은 안무를 따라 하는 동안 관객의 몸에서 접속 아닌 접촉을 일궈낸다. 안무를 따라하면서 발생하는 낯섦은 바로 타자의 피부와 접촉하며 발생하는 닭살이다. 어쩌면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무의식, 고아-무의식과 오늘날 가장 근접한 타자는 AI일지도 모른다. 

 안무 따라 하기가 끝나면 관객은 가챠를 통해 불특정 타자의 프롬프트를 선물 받는다. 관객이 마주한 낯선 피부의 주인은 해당 프롬프트를 작성한 자일까? 작품은 끝까지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오직 상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여 ‘너’로 향하게끔 만든다. 관객은 언제나 <‘너’로 댄스>한다.

<부우우---피이이--->

 이 작품의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어느 날, 몸속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 속에서 낯선 생명체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 해당 작품은 디지털 물성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VR이라는 테크네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몸속에 생긴 거대한 구멍에서 낯선 생명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설정은 라캉식 정신 분석의 도식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은 구멍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소리를 해명하기 위해 의사에게 분석 받는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재현하는 건 병에 대한 진실이라기보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과 함께 제시된 구멍 안의 개구리뿐이다. 게임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대표하는 “개굴개굴” 대신 “부우우—피이이--”라는 낯선 소리를 개입하여 병에 대한 명칭과 구멍의 진실 사이에 균열을 발생시킨다. 

 이 같은 울음소리, 즉 음성은 디지털 특유의 비물질적 물질과 공명하며 상징계로 들어오지 못하는 어떤 음성의 흔적을 남긴다. “부우우---피이이---”하고 우는 개구리와 “개굴개굴”하고 우는 개구리 그 어디에도 포섭되지 않는 어떤 개구리 X는 어떻게 우는 개구리인가? 그것은 도저히 상상될 수 없고 만져질 수 없으며 오직 미끄러짐으로서만 그 존재의 잠재성을 확인받는다. 그렇다. VR을 낀 채 디지털 세계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관객이 곧 어떤 개구리 X로 향하는 구멍이 된다. 주인공 몸에 구멍이 생겼다는 건 말 그대로 관객이 곧 어떤 세계의 구멍이란 의미다. 이 게임은 관객을 디지털 세계 안으로 끌고 오는 동시에 바깥으로 밀어낸다. 말 그대로 입구, 들어옴과 나감을 동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관객은 존재만으로 어떤 개구리 X의 존재를 보증한다. 관객을 끊임없이 정주와 이탈의 운동으로 인도하며 빈터의 공허함을 감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