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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쟁, 터
DD
·2026.03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고다르가 1979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한 페이지를 전부 “배워라”로 채웠던 걸 상기해보자. 그 ‘배움’의 시작과 끝이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역사, 즉 ‘이미지 고고학’의 융기였음을 떠올려보자.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 A라는 이미지는 언어-망 속에 a를 남기고 그 a는 다시 a’, a’’... 를 남긴다. “사건의 본질은 순수한 표면효과, 되돌릴 수 없는 비물체성에 있”1)다면, 이미지는 결국 전쟁-터다. 보통 우리는 이미지를 언어 단위로 분석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언어화된 이미지는 의미의 차원으로 환원되며 끝내 멈춰버린 몸(혹은 죽어버린 몸)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선 매순간 폭력과 죽음의 기류가 흐른다. 적이란 의미와 전투라는 사건은 시체 더미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발생한다. 이런 측면에서 게릴라전보다 이미지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건 없을 것이다. 어떤 몸이 죽은 몸이고, 어떤 몸이 위장된 몸인가? 이미지란 잠재된 의미와 사건이 온 지대에 존재하는 전쟁-터다.
그래서 이미지는 절대 정지 상태가 될 수 없다. 필립 라쿠-라바르트는 『무대』에서 이미지의 재-현(Re-présentation)적 측면을 ‘두번째로 다시 제시하다’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만들다’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즉, 이미지의 핵심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정지가 아니라 운동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정지된 순간에도 운동한다. 우리가 봤던 이미지는 이미 이곳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하고 또 배워야 한다. 고다르의 첫 번째 “배워라”와 마지막 “배워라”가 너무나 다른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면, <Can I Touch You?>의 두 무용수 또한 그러할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지라서 영화관에 없으며 영화관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관은 이미 이곳에 없다.
“여기서 보는 법을 배워라. 다른 곳에서 듣기 위해.
너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워라. 타인이 무엇을 하는지 보기 위해.
타인은 우리의 여기에 대한 다른 곳이다.”
고다르의 <여기 그리고 다른 곳>에서 언급되는 이 문장을 단순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경구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여기’와 ‘다른 곳’이 있다. 또한 ‘자신’과 ‘타인’이 있으며 그리고 ‘그리고’가 있다. 고다르가 천착한 컷과 컷의 유혈 사태에는 에이젠슈타인의 변증과 클레쇼프의 심리학적 마술 그 이상이 있다. 고다르는 이미지는 없고 이미지들만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는 그리고와 함께 다른 곳을 이미지화한다. 그러나 이때의 다른 곳은 여기와 동시적으로 현시될 수 없는, 선(線)을 통해 구획되는 또 다른 몸이다. 여기와 다른 곳은 침투 불가능한 몸으로서 동시에 비-동시적으로 재현된다. 다른 곳은 언제나 여기 이후에 드러나며 여기서 보는 법은 다른 곳에서 보는 법과 같을 수 없다. 현시함 안에 현시됨이 있고 현시됨 안에 현시함이 있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눈이 떠진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법을 배워라”와 “다른 곳에서 듣기 위해.”는 인과를 가진 문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는 법을 배우고 다른 곳에서 듣기 위해 또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배워야 한다”라는 경구의 진실이다. 이미지에는 인과도 필연도 없다. 죽어버린 아군의 몸과 은신한 적의 몸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따윈 없다. 전쟁-터에 필연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와 불확실성이 그려내는 접촉 불가 지대뿐이다. 컷과 컷의 연결로 발생하는 의미 생산에는 무의미의 존재가 전제된다. 점프 컷이 인과를 가질 수 있는 건 의미와 의미 사이의 무의미를 방기하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포착한 편집의 본질은 바로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다림에 있다. 이해될 수 없는 두 컷의 연결보다 기다림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없다. 기다림이란 죽음이 피부를 스침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해당 문장의 접면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 접면을 향한 질문은 이러하다. 타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고다르는 마지막 문장을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는가? 여기서의 타인은 우리의 몸이 침투할 수 없는, 그러나 우리의 몸과 필연적으로 맞닿고 있는 탈-존하는 몸이다. 그리고 이 몸은 파졸리니가 ‘죽음’이라고 말한 그 죽음의 몸이기도 하다. 전쟁-터에 굴러다니는 몸은 언제나 타자의 몸인 동시에 나의 몸이다. 우리 뒤에 있는 건 우리의 몸에 대한 다른 몸이다. 이미지가 환상이라는 말은 그런 측면에서 지극히 육체적인 담론이다.
1)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307p, 민음사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고다르가 1979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한 페이지를 전부 “배워라”로 채웠던 걸 상기해보자. 그 ‘배움’의 시작과 끝이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역사, 즉 ‘이미지 고고학’의 융기였음을 떠올려보자.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 A라는 이미지는 언어-망 속에 a를 남기고 그 a는 다시 a’, a’’... 를 남긴다. “사건의 본질은 순수한 표면효과, 되돌릴 수 없는 비물체성에 있”1)다면, 이미지는 결국 전쟁-터다. 보통 우리는 이미지를 언어 단위로 분석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언어화된 이미지는 의미의 차원으로 환원되며 끝내 멈춰버린 몸(혹은 죽어버린 몸)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선 매순간 폭력과 죽음의 기류가 흐른다. 적이란 의미와 전투라는 사건은 시체 더미 위에서도 멈추지 않고 발생한다. 이런 측면에서 게릴라전보다 이미지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건 없을 것이다. 어떤 몸이 죽은 몸이고, 어떤 몸이 위장된 몸인가? 이미지란 잠재된 의미와 사건이 온 지대에 존재하는 전쟁-터다.
그래서 이미지는 절대 정지 상태가 될 수 없다. 필립 라쿠-라바르트는 『무대』에서 이미지의 재-현(Re-présentation)적 측면을 ‘두번째로 다시 제시하다’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만들다’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즉, 이미지의 핵심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정지가 아니라 운동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정지된 순간에도 운동한다. 우리가 봤던 이미지는 이미 이곳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하고 또 배워야 한다. 고다르의 첫 번째 “배워라”와 마지막 “배워라”가 너무나 다른 영역을 점유하고 있다면, <Can I Touch You?>의 두 무용수 또한 그러할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지라서 영화관에 없으며 영화관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관은 이미 이곳에 없다.
“여기서 보는 법을 배워라. 다른 곳에서 듣기 위해.
너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는 법을 배워라. 타인이 무엇을 하는지 보기 위해.
타인은 우리의 여기에 대한 다른 곳이다.”
고다르의 <여기 그리고 다른 곳>에서 언급되는 이 문장을 단순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경구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여기’와 ‘다른 곳’이 있다. 또한 ‘자신’과 ‘타인’이 있으며 그리고 ‘그리고’가 있다. 고다르가 천착한 컷과 컷의 유혈 사태에는 에이젠슈타인의 변증과 클레쇼프의 심리학적 마술 그 이상이 있다. 고다르는 이미지는 없고 이미지들만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는 그리고와 함께 다른 곳을 이미지화한다. 그러나 이때의 다른 곳은 여기와 동시적으로 현시될 수 없는, 선(線)을 통해 구획되는 또 다른 몸이다. 여기와 다른 곳은 침투 불가능한 몸으로서 동시에 비-동시적으로 재현된다. 다른 곳은 언제나 여기 이후에 드러나며 여기서 보는 법은 다른 곳에서 보는 법과 같을 수 없다. 현시함 안에 현시됨이 있고 현시됨 안에 현시함이 있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눈이 떠진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법을 배워라”와 “다른 곳에서 듣기 위해.”는 인과를 가진 문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는 법을 배우고 다른 곳에서 듣기 위해 또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배워야 한다”라는 경구의 진실이다. 이미지에는 인과도 필연도 없다. 죽어버린 아군의 몸과 은신한 적의 몸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따윈 없다. 전쟁-터에 필연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와 불확실성이 그려내는 접촉 불가 지대뿐이다. 컷과 컷의 연결로 발생하는 의미 생산에는 무의미의 존재가 전제된다. 점프 컷이 인과를 가질 수 있는 건 의미와 의미 사이의 무의미를 방기하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포착한 편집의 본질은 바로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다림에 있다. 이해될 수 없는 두 컷의 연결보다 기다림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없다. 기다림이란 죽음이 피부를 스침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해당 문장의 접면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 접면을 향한 질문은 이러하다. 타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고다르는 마지막 문장을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는가? 여기서의 타인은 우리의 몸이 침투할 수 없는, 그러나 우리의 몸과 필연적으로 맞닿고 있는 탈-존하는 몸이다. 그리고 이 몸은 파졸리니가 ‘죽음’이라고 말한 그 죽음의 몸이기도 하다. 전쟁-터에 굴러다니는 몸은 언제나 타자의 몸인 동시에 나의 몸이다. 우리 뒤에 있는 건 우리의 몸에 대한 다른 몸이다. 이미지가 환상이라는 말은 그런 측면에서 지극히 육체적인 담론이다.
NOTES
- 각주
1)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307p,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