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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과 무지의 신화 : <M>과 <그저 사고였을 뿐>
음성과 무지의 신화 : <M>과 <그저 사고였을 뿐>
아이의 노랫말은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을 예고하는 신탁처럼 관객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린다. 그러나 관객은 M의 휘파람과 다음 컷에서 이어지는 신문 기사를 통해 사후적으로 아이의 노랫말을 의미화한다. 의미는 어떤 식으로든 언어를 통해 사건 속에 통합되며 그것의 표지로서 끊임없이 의미화를 반복한다. 참과 거짓이란 명제, 인류 발전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합리성은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언어의 노예이다. 그런데 <M>에서는 의미를 추동하는 언어, 정확히는 노래라는 형식의 언어가 휘파람과 가사로 분화된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에서 밝힌 듯, 민중 문자가 발전하기 전인 호메로스 시대에는 섭리가 박자와 격의 도움을 받으며 전승됐다. 또한 고대 그리스 연극은 서사를 진행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코러스를 요구하기도 했다. 볼 수 있는 것을 통제하는 말(하기)의 역사에서 노래 또한 진리의 매개체 혹은 합리성의 표지 역을 수행해 온 것이다. 문제는 이 노래가 음성과 문자라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층위로 쪼개지는 순간 발생한다.
<M>은 M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과학과 언어라는 합리성을 토대로 제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모든 이들은 합리적 판단을 기반으로 M을 추적하고 포획한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 아래 그려진 M은 당대 과학의 범주로서 표상되는 인간 인식의 극한점이다. 과학적 분석은 해석학을 기반으로 하는 이해의 방법이자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는 패러다임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의 인식 바깥에 있는 카메라만이 합리성에서 벗어날 역량을 가진다. 카메라는 M의 범죄 행각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러한 선택을 윤리적 맥락으로만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윤리적 맥락조차 재현 체계에 내재하는 불가능성과 관계한다고 본다. 합리성은 그 자신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비합리성과 마주한다. 이 같은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논증하는 가장 단적인 예가 삼단 논법의 선험적 원리다. 삼단 논법을 역으로 타고 올라갔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마지막 원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중세 신학은 이것을 신으로 귀결하였으나 칸트는 그것을 물자체라는 미지의 의미심장함으로 수습한다. 물론, 이 같은 물자체란 개념을 두고 후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논쟁을 펼친 건 사실이나 흄이 고발한 합리성의 의미심장함을 경험과 관념 사이로 미끄러트린 칸트의 위대함은 무시할 수 없다. 현대 사상의 대부분이 칸트로 되돌아오는 이유 또한 합리성의 비합리성이란 칸트식 겸손에 주목하기 위해(가장 대표적인 예가 들뢰즈다. 들뢰즈 철학은 조금 과장해서 칸트 철학의 재번역이라 봐도 될 정도다)서니까.
이 영화가 살인범 M을 재현하는 방식도 이 의미심장함, 시적 상상력이란 비합리적 방식에 기댄다. 가게 앞에서 소녀가 책을 구경하는 장면을 보자. 위아래로 수직 운동하는 화살표와 원점에 영원히 도착할 수 없는 회전판은 M의 휘파람(음성)과 만나며 M이란 언표를 불일치시킨다. 즉, 언표 주체(‘M은 살인범이다.’라는 문장 속 지시 대상인 실제 M)와 언표 행위 주체(살인범은 M이라고 말하는 자)의 미끄러짐만이 살인범 M의 실재를 가장 선명하게 재현한다. 이러한 미끄러짐 속에서 재현은 ‘다시 제시하다(Represent)’라는 명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현재형으로 만들다(Re-Present)’라는 동사적 맥락으로 재배치된다. 오직 반복되는 현재만이, 과거도 꿈도 기억도 없는 순수한 찰나만이 살인자 M을 실존하게 만든다. 살인범 M의 실재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반복하는 세계보다 반 박자 빠른 세계에 있다. 그 세계는 인간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바깥, 모든 근거가 와해되는 무한한 과거의 미래다.
이 영화에서 M은 노래처럼 두 개의 층위로 분화된다. 우선 배우의 몸을 통해 인식되는 M이 있다. 그것은 정신의 첨점이자 문자로서 드러나는 신화다. 반대로 휘파람을 통해 감각되는 M이 있다. 이것은 시간의 경첩에서 풀려난 타자성이자 연기(차이)의 역량이다. <M>의 결말이 비극적인 이유는 M이 적절한 처벌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결말 속 여성은 자기 자신의 아이를 잃게 만든 광기를 격렬하게 뿜어낸다. 그녀는 자신이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들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모든 이들, 심지어 <M>이란 영화조차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이 영화의 진짜 비극은 랑시에르가 코르네유와 볼테르의 <오이디푸스>에서 발견한 “지식과 비지식의 비극적 동일성, 자발적 행위와 수동적으로 겪게 되는 파토스의 비극적 동일성”이다. 이것은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는 현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음성과 타자의 음성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매 순간 메소드 연기를 수행한다. 『오디세이아』에도 이 메소드 연기를 가로지르는 놀라운 텍스트가 있다. 아름다운 노래로 인간을 유혹해 잡아먹는 세이렌 자매는 오디세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우리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지 않은 채 검은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누구나 우리의 목소리를 즐기고 더 많은 걸 알게 된 후 지나갔지요.”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마녀 키르케의 도움을 받아 세이렌 자매의 존재를 미리 알게 된다.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전달한 세이렌 둥지의 파훼법은 다음과 같다.
1)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아 세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는 것
2)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대신 돛대에 손과 발을 묶는 것
오디세우스는 1번이 아닌 2번을 택하며 홀로 세이렌의 노래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다소 이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세이렌 자매의 노래를 듣는다면 노래를 듣는 자는 지금껏 아무도 알지 못했던 세이렌 자매의 노래를 알게 되는 동시에 죽고 만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몸을 돛대에 묶는 것만으로 세이렌의 노래를 듣는 동시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불가능한 앎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운동성의 박탈, 매 순간 지금-여기란 현재로부터 미끄러지기에 있다. 운동한다는 건 이미 시간을 육화하고 있음이며 그래서 불가능한 앎에 도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같은 육체와 앎, 죽음의 관계는 <M>에서도 반복된다. M의 사형은 끝없이 유보된다. 그의 죽음이 끊임없이 지연되는 까닭은 살인자 M의 몸이 지금-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M을 변호하는 사이비 변호사가 M의 사형에 반대한 이유는 그가 법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이란 과거를 역사화하기다. 법의 최고 형량인 사형은 범법자의 현재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범법자의 모든 과거를 종합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란 미래가 없기에 내려지는 모든 과거의 궁극적 대문자화다. 현재형을 반복하는 M은 그런 측면에서 죽음도 법적제재도 불가능하다.
고전이 보여주는 이 탁월한 사유를 붙들고 대략 100년이 지난 현재로 이동해보자. 현시대의 작품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역사화란 반복되는 신화 속에서 발견되는 미개척 지대로의 불시착을 대문자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원점에서 벗어나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진보를 수행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역사의 신화, 신화의 역사라는 음성과 무지의 신화에는 바깥이 없다. 흥미로운 건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러한 위상학적 관계 자체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히려 위상학적 관계와 현실 감각 사이의 불균형에 더 관심 있어 보인다.
절대 악은 광활한 자연 앞에 당당히 서는 인간 이성을 향한 존경심에서 비롯된다. 에크발은 악인이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면서 절대 악을 수행한다. 즉, 에크발은 악인 에크발을 연기한다. 우리는 바히드가 에크발을 나무에 묶고 떠나는 장면을 보며 바히드가 에크발을 용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바히드가 때리는 에크발은 악인을 연기하는 에크발이며 바히드는 절대 에크발의 과거를 처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바히드가 에크발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에크발은 메소드 연기의 고수일 뿐, 진짜 악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음도 법적제재도 불가능한 에크발의 악은 끝내 타자성 자체와 유착되며 에크발의 존재를 거대한 위험 분자로 만든다.
결말에서 바히드는 혁명 이후의 세계를 사는 사람처럼 희망차게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뒤에서 에크발의 절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이 공포는 특정 과거가 아닌 모든 과거의 미래에 근거한 반응이다. 모든 근거의 와해와 마주한 바히드의 감각은 마비되고 그의 판단 또한 무한히 지연된다. 관객도 마찬가지다. 바히드의 얼굴이 아닌 뒷모습을 보며 그들은 판단의 무한한 지연을 강요받는다. 바히드와 관객 모두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끊임없이 역전되는 지각판 위에 묶여 있다. 에크발의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일상의 소리는 반복된다. 그것은 세이렌의 노래처럼 아름답고 M의 휘파람처럼 잔혹하다. 바히드는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곧 앎을 대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히드의 정지는 감각의 마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앎을 스스로 거부하기 위한 무의식적 분열일지도 모른다. 지금-여기에 들려오는 에크발의 발소리가 고문관 에크발의 발소리라는 사실을 모르기 위해. 바히드는 영웅의 자리에서 물러난 현실적인 오디세우스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소실점을 쫓으며 선형 원근법을 그리던 개는 끝내 인형이 되어 스크린 중앙에 박제되고 만다. 선형 원근법이 무기력해진 시대에 차를 이끄는 앞좌석과 앞좌석의 선택에 순응하는 뒷좌석은 차 사고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두고 다툰다. 사고는 차 운전을 직접 수행한 에크발의 잘못인가? 아니면 노랫소리를 키워달라고 칭얼거린 딸의 잘못인가? 앞좌석과 뒷좌석도 아닌 스크린 밖의 관객은 스크린의 돛대에 묶인 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한다. 그들의 싸움은 합리적이나 너무 시끄럽다. 주체의 지위를 상실해 무기력증에 걸린 우리는 그들의 싸움을 절대적으로 타자화한다. 절대적 타자화는 곧 절대적 동일성으로의 회귀다. 분열자는 필연적으로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그들(우리)에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그저 사고(思考)였을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의 사고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 사고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일지 모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