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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대한 단상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오늘날, 영화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 이렇게 다시 질문해보자. 영화‘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까지 충분히 많은 시간을 소요한다. 우선 영화관이란 공간으로 이동해 영화 티켓을 구매한다. 또한 영화 상영 전에 의자에 착석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렇게 영화관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를 보기 위해 썼던 모든 과정은 영화를 마주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유의미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의 맥락은 신학적 구조와 닮아있다. 「요한복음」의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는 욕망과 금지라는 서로 다른 벡터 사이에 신이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기다림의 긍정으로 통용된다. 금지와 욕망의 충돌로 지연되는 접촉과 기다림의 인고는 곧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힘이 된다. 그러나 이는 신이 오지 않는 기다림이 무의미한 기다림이라는 말이 아닌가? 무의미한 기다림이란 곧 신이 오지 않는 기다림, 신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세계 속의 기다림이다. 기독교적 맥락에서 의미는 곧 신이다. 종교적 맥락에서 모든 일엔 신의 뜻이 있어 모든 곳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은 죽었다. 동시에 형이상학적 신은 해체된다. 그럼에도 새로운 신은 시의 행간 사이에 모습을 숨긴다. 그 신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신은 영원히 잠을 잔다.
영화관의 제의적 성격은 스크린이라는 평면에 구현되는 시공간의 재-현과 그곳으로의 접촉 불가로만 비롯되는 게 아니다. 앞서 살펴봤듯, 의미 있는 기다림이 전제될 때 영화관은 비로소 영화관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기술 발전으로 카메라가 대량 보급되고 OTT 산업으로 영화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영화관에서 발생하는 제의적 신비성은 점차 그 힘을 잃어 갔다. 특히 기술 발전으로 비롯된 시간 단축은 기다림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다. 영화관 폐관의 의미는 단순 산업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기다림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가해지는 현대 사회의 이상 증세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교실에서 대면하는 학생들은 저 무역사적이고 반기억적인 블립 문화에서 태어난 세대다. 다시 말해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디지털의 극소 조각들로 이미 잘려있었다.”
마크 피셔, 박진철 옮김,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77p, 리시올
현대인에게 의미 없는 기다림보다 경련을 유발하는 행위는 없다. 영화관은 기다림을 통해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고, 입장료로 돈을 요구하면서 재미없는 영화와 마주할 상황은 막아주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영화관은 현대 사회의 유일한 모험 가능 공간, 동시에 낭만주의자들의 마지막 노동 공간이다. 재미 없는 영화를 보는 건 이제 노동과 구별되지 않고 이 노동을 위해 발생한 기다림은 무의미의 세계로 추락한다. 시간 낭비, 돈 낭비는 만질 수 없음의 즉각적 감각화요, 물신을 향한 신성모독이다.
정보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알 수 없음은 더 이상 믿음과 낭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 현대 사회의 무지는 인간의 자유를 허무하게 만들고 일상의 운동을 마비시킨다. 자유의 즉각적 현시가 운동이라면 마비된 인간은 가장 탈인간적 인간일 것이다. 기다림 끝에 신이 온다는 신학적 맥락은 더 이상 기다림에 유의미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 기다림 끝에 신이 올 것인가? 이 질문의 열려 있음 자체가 현대인의 운동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기다림이 불가능하다. 더 정확히는 무의미의 그림자를 밟을 겨를이 없다. 접촉으로의 욕망과 금지라는 서로 다른 벡터의 충돌로 신의 그림자가 드러난다면, 물신(物神)은 정확히 그 반대 구조 속에서 현현된다. 현대 사회의 진정한 비극은 물신이 인류의 피부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물신은 말한다. “나를 만져라(Tange me).” 현대 사회에서 만질 수 없음보다 무의미한 것은 없다.
스크린 속에서 디지털 단위로 분쇄되는 시간과 분쇄되는 시간을 실시간으로 감각하는 육체 사이에서 그는 비시간적 세계를 경험한다. 비시간적 세계는 비선형적 시간과는 무관한, 도식화 불가능한 순수 감각의 공간이다. 영화관은 이 순수 감각의 공간을 시스템이라는 권력을 통해 붙잡아 놓는다. 영화를 보며 휴대폰을 보는 정신 분열적 관람은 기실 이 순수 감각의 공간에서 탈주하는 참을 수 없는 운동에 가깝다. 영화관은 신이 자고 있는 침실이다. 몰입이 존재하지 않는, 정확히는 의식의 지향이 좌절된 영화 관람은 지금껏 드러난 적 없는 세계의 뒷면을 드러낸다. 여기서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영화관은 매순간 우리가 아는 영화관 앞에서 미끄러진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영화관의 존재론은 다수와 하나 사이에서 목격되는 하나-없음의 구조를 그린다.
기다림이란 의미의 미도착, 탈구된 시간의 프랙탈이다. 기다리는 자는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즉, 이때의 무지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진정한 무지다. 인간의 운동을 멈추는 무지는 실상 모름을 알게 됨이란 앎의 층위에 있다. 소녀의 운동은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의미와 무의미의 비-동시성 사이에서 생성된다. 그리고 몸보다 비-동시성을 투명하게 증명하는 것은 없다. 하염없이 움직이는 몸은 의미라는 신이 영원히 미도착하는, 신조차 잊어버린 세계다. 아무도 볼 수 없고 아무도 찾지 않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잉여적 운동이 있고 시간이 있다. 잉여적 운동이란 현시와 무관하게 좌표에 안착하지 못한 잔여적 운동이다. 삶은 앎이란 정지와 무지란 운동의 반복이며 잉여적 운동은 이 앎과 무지 사이에 내재하는 차이이자 반복의 관절이다. 그리고 기다림은 운동도 정지도 아닌 잉여적 운동의 순수한 표지다. 끊임없이 질문을 생산하며 불가해와 무의미를 산출하는, 계산할 수 없고 계량될 수 없어 프레임 단위로 포착되지 않는 진동. 편집-점은 그런 측면에서 분화된 운동의 총체이자 잉여적 운동-장이다. 편집 과정에서 끊임없이 깎여나가는 운동 속에 잉여적 운동이 있다.
영화관은 영화의 운동을 배제한 나머지 잉여적 운동을 통해 존재의 빛을 발한다. 영화가 좌표라면 영화관은 좌표 바깥에서 아른거리는 미지의 벡터다. 영화관은 흐른다. 그러므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