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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논리도 꿈을 꾸는가 : <모던타임즈>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순환 논리는 꿈을 꾸는가?
홀라파는 술집에서 왜 우울하냐는 질문을 받자 과음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는 곧장 그럼 왜 계속 술을 마시냐는 질문을 받고 우울해서라고 답한다. 보통 우리는 순환논리가 ‘A는 B이다. 왜냐하면 B는 A이기 때문이다.’ 같은 A에서 A로의 회귀를 발생시키며 문장의 정보값을 0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정보와 함께 인과를 인식하는 인간은 그래서 이 같은 무의미한 반복 속의 정보를 잡음으로 처리해 왔다. 전쟁에 대한 정보도 이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극 중 인물들에게 반복되는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은 음식 조리 완료보다 중요하지 않다. 전쟁은 전기세 통지서보다 파괴적이지 않고 오지 않는 로맨틱한 전화보다 비극적이지 않다. 전쟁은 궁핍과 사랑에 비하면 무감각한 사건이다. 그것은 마치 홀라파가 잃어버린 안사의 번호처럼, 쓰레기장으로 곤두박질치는 쓰레기들처럼 몸에서부터 나가떨어지는 유실물에 가깝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선 모든 것이 몸을 통과해 유실된다. 그런데 유실돼 더 이상 무의미해 보였던 것은 때때로 새로운 의미와 함께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던가. 영화는 이러한 의미의 우연성을 순환 논법의 비밀 속에서 발견하며 의미의 경제에서 관객을 해방시킨다.
순환 논법이 무엇이냐는 홀라파의 물음에 그와 술을 마시던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다 잊어 버려.” 이것은 지금 나눈 대화를 다 잊어버리라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순환 논법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문장에 가깝다. 그렇다면 망각과 순환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순환 논법의 오류는 논리학 안에서만 유효하다. 흐르는 시간 앞에 똑같은 반복이란 없다. 모든 반복 안에 차이가 있으며 같은 말조차 그것에 내재한 강도가 다르다. 홀라파가 술병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과 안사에게 술을 끊었다고 고백하는 장면 사이에는 뜬금없는 자연 풍경들이 삽입돼있다. 해당 컷만으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컷들의 의미는 홀라파가 안사에게 술을 끊었다는 고백이 드러남으로서 새로운 컷으로 재생성된다. 동시에 관객은 그 풍경 이미지 안에, 더 정확히는 망각했던 시간 안에 홀라파가 술을 끊는 과정이 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같은 의미의 드러남은 안사의 병문안 씬에서도 반복된다. 반복되는 혼잣말에도 깨어나지 않던 홀라파는 안사가 이마에 키스하자마자 순식간에 눈을 뜬다. 그럼 안사의 혼잣말은 무의미했던 행위인가? 그것의 진실은 오직 시간 안에 숨어 있다. 잡음은 햄릿의 유령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남을 반복하는, 거시 사건 안의 미시 사건이다. 그래서 우연은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의 결괏값이며 운명은 자유의 결과이다. 둘은 보이지 않는 타자의 존재 근거이지 신의 존재 근거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구현하는 연대가 환대, 더 정확히는 기독교적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연대는 특수한 목적을 기반으로 생성되는 이해관계의 역학적 행위 혹은 상태다. 반면 기독교적 사랑은 목적과 무관하게 존재 자체만으로 발생하는 타자를 향한 접속이다. 둘만 놓고 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윤리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같은 사랑은 불가능에 가깝다. 몸이라는 최소한의 물질을 담보해야 하는 인간은 접속이 아닌 접촉의 형태로 세계와 부대낀다. 피부 위에서 발생하는 미지의 감각이 어떻게 위협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정말이지 신만이 가능한 사랑, 몸과 몸이 접촉될 때 발생하는 모든 고난함의 시간을 재현 체계 바깥으로 내쫓는 인스턴트 사랑이다. 카메라가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듣는 안사를 프레임 안에 정착시키는 동안 전자레인지 안에서 인스턴트 음식은 빠르게 제조되고 있다. 이때, 안사의 뒤로 그려지는 유리창 속 안사의 얼굴은 현재의 시간을 빠르게 분화한다. 어떤 현재의 안사는 우크라이나 전쟁 정보를 듣고 있지만, 또 다른 현재의 안사는 우크라이나 전쟁 정보를 잡음으로 처리한다. 불가능한 현재와 가능한 현재 그리고 그 둘의 종합적 재현을 수행하는 안사의 몸은 시간의 흐름을 버티지 못한다. 결국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전자레인지 속 음식은 먹을 수 없는 상태로 안사와 관객 앞에 도래한다. 이 영화는 이 같은 기다림, 낭만주의적 무한한 고양감으로 발생하는 미래의 현재화를 스스로 답습한다. 사랑이라는 낭만적 실천 속에 답이 있다는 게으른 판단으로 영화를 마무리 지으며 전쟁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모든 사건에 의미가 도래할 것이라 믿어버린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 속에서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결국 분열증화에서 분열증으로 수렴된다. 이 같은 필자의 지적을 부분의 전체화라고 말한다면 곤란하다. 이 영화가 선택한 존재론은 명백히 시간 중심이며 이 영화의 모든 프레임은 분열증화가 반복되는 이미지-신체를 구성한다. 이미지-신체란 텍스트와 이미지의 미끄러짐, 텍스트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이름 없는 이미지의 자율적 생산이다. 부분과 전체의 위상학을 구현하려는 위대한 시도 앞에서 부분을 전체화한다고 불평하는 건 오히려 이 영화를 평가절하하는 일이다. 이 영화는 자신이 분열증에 걸렸다는 걸 너무 알고 있다. 그러나 분열증화는 끝끝내 분열증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모던 타임즈> 속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혁명은 아직 꿈이 아닌 현실이다. 그들은 혁명(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의 전체 집합)을 위해 시위할 수 있고 백화점을 약탈할 수 있으며 같은 프롤레타리아라는 이유만으로 술잔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 속 찰리 채플린을 무엇으로 봐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는 극 중에서 혁명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와 현실에 안주하려는 프롤레타리아 사이를 오고 간다. 그뿐인가. 그는 극 중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연기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스타로서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다. 그가 영화에 존재하는 방식은 그래서인지 꼭 글리치 같다. ‘밀리거나 미끄러지다’라는 독일어 ‘glitschen’에서 유래된 것처럼 찰리 채플린은 그의 영화에서 끊임없이 밀리거나 미끄러지며 오류를 발생시킨다. 그는 공장 기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거나 끊임없이 백화점 표면 위에서 미끄러진다. 소녀가 구한 집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더 두드러진다. 집은 찰리 채플린의 정주를 허용할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그를 공격하고 바깥으로 내쫓는다. 이러한 강제적 운동은 영화 결말에서조차 이어진다. 그는 소녀를 잡으려는 선도원에게서 도망치며 소녀와 함께 포장도로 위를 걷는다. 내 생각에 채플린은 서사 속 인물이라기보다 노동의 순수한 운동, 육체가 그리는 의미와 무의미의 종합적 표상에 가깝다. 그의 운동에는 자본주의 논리 아래에서 움직이는 모든 노동(심지어 쁘띠 부르주아나 부르주아조차 포섭하는)의 초상이 잠재해있다. 즉, 찰리 채플린은 자본주의의 이미지-신체다.
결말에서 포장도로는 산을 향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이 포장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 것인가. 그는 언제쯤 포장도로 바깥으로 탈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마크 피셔의 말마따나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은 지구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멸망할 때까지 찰리 채플린은 정주할 수 없을 것이며 <모던 타임즈>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