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소통의 가능성과
사건의 종말 다시 쓰기
모더니티를 다시 쓴다는 건 포스트모더니티로 좌표화되는 모든 순간에 저항하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모더니티 안에 포스트모더니티가 내재해 있었음을 '모던'의 시간성을 근거로 들며 모더니티를 포스트모더니즘 대신 고전과 대비시킨다. 고전 시대는 '도래할 것과 지나간 것, 미래와 과거를, 그것들이 함께 묶여서 마치 동일한 하나의 의미 단위 안에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처럼 간주'1한다. 가령, 신화는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어 그 전체를 완벽히 종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모더니티는 매번 '다시(Re-)'를 반복하며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지금의 재-현(Re-present)과 고전한다. 반복되는 지금 속에서 현시되지 못한 또 다른 지금이 동일한 이미지의 오명을 벗은 건 분명 모더니티에서 비롯된다. 이미지의 근대성이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고다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답군. 하지만 이미지(영화)는 아니야."다.
민주주의의 패배와 파시즘의 낭만화라는 속력의 왜곡된 풍경은 자본주의와 가속주의 간의 접합 지점이 잘못 매핑되며 발생하는 오해다.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불가능한 운동의 불능, 앞이 당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지성의 무능과 마주하게 만든다고 결론짓는다. 시간성의 담론을 통해 배태되는 민주주의의 회의적 시각은 사실 시간 자체보다 세계와 인간, 실재와 언어 사이의 균열이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증상에 초점을 둬야만 한다. 즉, 민주주의의 문제는 미래가 아니라 존재라는 의미심장한 이미지와 어떻게 관계맺을 건인지가 핵심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의미심장함은 정신분석가들의 분열에서도 드러난다. 머릿속이 온통 삼각형으로 가득 찬 정신분석가의 말버릇인 '이것은 저것이다.'는 삼각형이 유일한 도형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정신분석가(라캉 이후로 고아가 된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이것은 이미 저것이 아니다.'로 이동한다. 이 같은 가족 서사의 붕괴 속에서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성 그 자체의 운동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을 보인다. 특히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의 기호는 언제나 많은 차원을 가진 하나의 기호-점이며, 점 기호론의 기초로서의 다성성(多聲性)"2이라고 명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호'는 기표/기의 같은 소쉬르식 기호학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른다. 기호는 욕망의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표지이며 욕망의 기호란 시공간(지금의 반복이라는 모더니티의 핵심)의 표면, 지금-욕망-생성의 꿀렁임을 직조하는 차이와 반복의 이정표다. 오이디푸스는 이 꿀렁임의 국지적인, 그러나 지정학적으로 유리했던 영토의 일부였을 뿐이다. 삼각형 바깥에는 끝없는 미지의 영토가 펼쳐져 있었으며 이미지는 삼각형 바깥과 마주하는 순간부터 정치성을 획득한다.
나는 이미지 탐색의 핵심 역량을 지성이 아닌 상상력에 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영토 탐색과 함께 진행되는 지도 그리기는 현시되지 않은 이미지를 재-현(Re-present)하는 일이요, 삼각형 바깥으로 밀려났던 이미지를 발굴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현시되지 못했던 무언가(어떤 이미지 X)를 감각(예술)하고 그것을 개념화(철학)하는 종합적 탐구에 가까운데 이때 상상력은 감성과 지성의 매개 이상의 역할을 한다. 상상력은 본래 칸트적 맥락에서 "대상의 현전 없이도 그것을 직관에서 표상하는 능력"3인 지성과 감성의 매개로 인식됐었다. 그러나 "상상 의식이 기본적으로 부재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비슷하게 재현해 낸 물질적 대리물"4이 필요한 걸 떠올려보면 상상력을 조금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 상상이란 불가능과 마주하려는 시도이자 부재하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 부재하는 것에서 끊임없이 멀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상상력이 능력이라기보다 역량에 가까워 보이며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상상력은 단순 지성과 감성의 매개를 넘어 불가능의 가능성을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칸트가 숭고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이성 이념의 동력이다. 칸트는 상상력을 압도하는 자연의 무한함이 이성 이념을 통해 인간 존재를 향한 존경심으로 전환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자연의 무한함과 대립할 수 있게 만드는 태초의 역량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주장하는 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상상력을 재생적 상상력과 생산적 상상력으로 구분하는데 『판단력 비판』에서는 이러한 상상력의 구분이 다소간 모호하게 개진된다. 특히, 숭고와 관련된 논의에서 마비되는 상상력의 정체가 불분명한데 내 생각에 이때 마비되는 상상력은 오직 생산적 상상력뿐이다. 상상력의 논의에서 재생적 상상력은 아직 제대로 탐구되지 못했으며, 따라서 나는 이성 이념의 동력으로서 유효한 상상력의 역량 중 재생적 상상력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칸트가 초월 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의 영역이라고 평가절하한 재생적 상상력을 사건의 종말이 가까워지는 오늘날 톺아볼 필요가 있다.
생산적 상상력은 앞에서 살펴본 현전 없는 표상 능력의 핵심인데 중요한 건 그것이 "형상적인 것으로서, 일체의 상상력 없이 순전히 지성에 의거한 지성적 종합과는 구별된다"5라는 것이다. 칸트는 판단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도식과 도상을 구분하는데 그는 도식을 도상의 시간적 압축으로 여긴다. 그가 실제로 인용한 사례로 예시를 들어보자. 00000은 5의 도상이다. 그러나 숫자 1000을 사고한다면 그건 도식이자 0을 1000번 표상하는 과정의 경제적 규칙화다. 여기서 칸트는 도식이 상상력의 생산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때의 상상력은 0을 인식했다고 가정하는 재생적 상상력과 0의 1000번 표상을 경제화할 수 있는 생산적 상상력의 동시적 발생을 전제한다. 그럼, 반대로 무한을 표상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비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0을 무한 번 표상해야 하는 생산적 상상력뿐 아닐까. 여기서 상상력이 지성과 감성의 애매한 오작교로 작동하고 있음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상상력의 핵심 역량인 도식의 경제성을 지성의 규칙성과 엮는다. 그런데 그가 정작 상상력 자체를 지성이 아닌 감성에 가까운 것이라 규정하는 건 아이러니하다. 덕분에 상상력은 생산적 상상력의 지성적 역량과 재생적 상상력의 감성적 역량이 혼합된 모호한 능력처럼 표현된다. 재생적 상상력이 생산적 상상력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사태 또한 칸트의 병목인 지성과 감성의 비대칭성(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고차적인 작용의 배타적 의존)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꼴이 된다.
재생적 상상력은 이성의 역할인 의식의 지향이자 세계를 응시하려는 욕망의 물리적 지지체다. 칸트는 상상력에 관해 설명할 때 자발성을 특히 강조한다. 그런데 생산적 상상력은 명백히 지성적 역량에 가까우며 지성은 인식 대상을 필요로 하기에 생산적 상상력 그 자체가 자발성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재생적 상상력을 통해 표상된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산적 상상력은 경제적 활동을 구현할 수 없다. 반대로 재생적 상상력은 칸트의 주장처럼 "연합의 법칙들에 종속하는 것으로, 따라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6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신체이자 지성에서 감성으로 분출되는 욕망의 관절 역할을 한다. 재생적이란 명칭은 반복해서 세계와 마주하고자 하는 의식의 무한한 운동성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실제로 칸트는 재생적 상상력을 경험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데, 덕분에 이것은 개념의 유무와 무관하게 세계를 의식하는 직관의 종합으로 재해석할 여지를 준다. 이렇게 비유해도 괜찮다면 나는 재생적 상상력을 사진적이라고 생산적 상상력을 영화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재생적 상상력은 세계와 주체가 낯선 상태로 마주할 수 있게 하는 핵심 능력이며 인간 인식에 선행하는 세계와의 접촉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오해를 방지하자면 나는 지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어쨌거나 아름다움은 "상상력이 자유로운 가운데서 지성의 합법칙성에 부합하는 것"7이다. 지성 없는 상상력의 자유는 혼란만을 의미하며 상상력 없는 지성은 천재적인 순간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내가 지성보다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미적인 것은 개념 자체보다 사건이라는 개념'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같은 개념의 동사화는 미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미학의 전반적인 연구 주제가 점차 숭고에 대한 탐구로 무게가 쏠리게 되며 미적인 것은 고리타분한 테제로 인식됐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샤비로는 『기준 없이』에서 아름다움의 새로운 탈주로를 그리며 동사적인 아름다움, "어떤 조건이나 상태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사건, 과정"8을 언급한다. 물론, 『판단력 비판』이 애초부터 『순수이성비판』의 초월론적 이론과 『실천이성비판』의 실천적 행위를 연결하기 위해 고안된 책이었음을 상기하면 이 같은 해석은 놀라운 해석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이 같은 미적인 것의 운동성이 숭고와의 관계를 통해 더 짙은 정치적 수행성을 얻게 되면서 동사적 아름다움은 오늘날 유효한 테제로 자리 잡게 된다. 가령, 숭고가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현시될 수 없는 것의 재-현(반복)이라면, 아름다움은 통제할 수 없고 아직 호명되지 않은 사건(차이)을 향한 시적 환대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시적 환대는 환대의 실패 가능성과 마주하는 언어의 실존적 형식을 말한다. 아름다움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과 개념 없는 파토스의 창발은 소통이라고 하는 정치적 실천의 새로운 핵심이자 민주주의를 향한 회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이미지 자체는 분명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 이미지와 접촉하는 과정은 아름다울 수 있으며 그것은 곧 이미지 정치학의 시발점이 된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건 더 이상 이미지와 아름다움의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이미지와 아름다움의 접합을 위한 운동의 촉발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되돌아봐야 할 능력이 바로 재생적 상상력인 것이며 그것은 세계를 끊임없이 낯설게 만드는 핵심 능력으로서 오늘날 재평가돼야 한다. 또한 미적 소통은 소통 불가능성이라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생성되는 주체와 타자의 비의지적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연구의 병목은 사건의 우연성이 점점 기술 과학의 함숫값으로 고정되는 사태 속에 있다. 사건이란 단순히 낯선 무언가와 마주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지와 부대끼고 세계와 감응하려는 미적 소통의 전제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 같은 사건의 우연성이 기술에 의해 미리 차단된다. 사건 A의 잠재성은 가능성이라는 현실적 차원으로 추락하며 사건 C, D...로 나아갈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한다. 현재는 오직 기술이 의도하는 특정 미래 B를 향해 강제로 이동된다. 가령, 일기예보의 실패는 새로운 미래와의 조우라기보다 통계의 오류라고 인식되지 않던가. 기술은 이 오류를 토대로 더 구체적이고 선명한 미래 B를 향해 돌진하며 사건 C와 마주할 미래를 박탈한다. 아니, 정확히 말해 사건 C의 현시를 강탈한다. 즉, 우리는 일기예보의 정확도 상승을 통해 더 규격화된 날씨 정보를 얻는 동시에 예측이 빗나가면서 발생하는 파토스를 잃어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AI가 점차 인간의 일상까지 침투하면서 선택이라는 자유의 물리적 현실태는 AI의 합리성에 의해 제한되기 시작한다. 기술은 분열증적 과정의 통제를 자유의 부정적 측면을 근거로 들며 우리가 가족 서사 안에 제 발로 들어가게 유도한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자유의 이미지는 긍정에서 부정으로, 계열화에서 미분화의 문제로 편향되며 다양성을 카오스로 이미지화할 것이다. 알고리즘은 확률 뒤로 사라져가는 사건의 우연성을 은폐한 채 자유의 긍정적 이미지만을 표면화하는 기술 과학의 유토피아적 상징이다. 알고리즘 도파민의 양면성을 알고도 멈출 수 없듯, 우리는 기술 과학이 자유에 내재한 사건의 우연성을 통제하는 걸 멈출 수 없다. 인류는 기술 과학과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기엔 몸이 너무 무거워졌다. 이제 알고리즘의 뒷면에선 새로운 비극(운명을 생성하는)에 대한 예언이 흘러나온다. 이 시대의 오이디푸스'들'은 들어라. 그대들은 '기계와의 결합(기계와의 섹스)' 혹은 운명에서 '소외(두 눈을 뽑힌 채 서사 바깥으로 추방당하는 오이디푸스)-되기'와 마주할 것이니. 전자는 재생적 상상력을 비인간 지성체에 외주 맡기는 미래이며 후자는 생산적 상상력이 발휘될 수 없는 자유의 부정적 현시 속에서 그 역량이 완전히 고립되는 미래다. 새로운 오이디푸스'들'이 마주할 최악의 결말은 여전히 볼 수 없음일 것이다. 다만, 이번 실명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가득한 세계로의 초대가 분명하다. 예술의 종말은 단순히 예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성립되는 사건이다. 예술의 종말은 인류 최악의 사건이자 인류 마지막 사건이 될 것이다. 사건의 종말은 상상의 종말, 더 나아가 자유의 종말과 다름이 없다.
하나의 기호 안에는 무수한 층위의 기호들이, 그리고 다양한 층위의 기호들 안에는 또다시 계열화되는 다성적 기호들이 존재한다. 들뢰즈가 잠재성과 가능성을 엄밀히 구분하려 한 이유는 가능성이 의미의 사건화를 가능과 불가능이란 이항 구도로 환원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모더니티 다시 쓰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던 타자를 재감각하는 일이다. 미적 소통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기존 영토의 코드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공리계와는 명백히 다르다. 미적 소통은 인간 인식 바깥에 존재했던 미개척 지대, 현시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겨졌던 타자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상상되어야 할 존재로 재인식하는 정치적 행위다. 인식할 수 없음에 저항하는 다시(re-)의 분열증적 운동은 공리계를 마비시키며 끈질겼던 신경증으로부터 현대인을 해방한다. 해방된 그들은 외친다. 언어화될 수 없는 이미지 위에 지금이란 피부를 맞댈 것. 미적 소통이란 철학일 수도 예술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정치적 운동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런데 미적 소통은 정말 코드로부터 억압됐던 동일성의 타자들을 해방하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미적 소통의 과정에서 사건의 종말이라는 끔찍한 비극의 탈주로를 끝내 그려낼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조차 생성이란 절대적 제국주의의 프로그램화를 공고히 하는 자본주의의 은밀한 모략이 아닐까? 먼 훗날 인류는 미적 소통조차 사건의 종말을 다시 쓰는 행위였다고 부르진 않을까. 어쩌면 사건의 종말 자체가 사건인 동시에 종말인 인류 최대의 난제가 아닐까.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이승현, 안소현 옮김, 『비인간』, 51P, OIUI
- 들뢰즈/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안티–오이디푸스』, 199P~200P, 민음사
-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B150 360P, 아카넷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이승현, 안소현 옮김, 『비인간』, 144p, OIUI
-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B153 361P, 아카넷
-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B153 361P, 아카넷
-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판단력 비판』 356P, 아카넷
- 스티븐 샤비로 지음, 이문교 옮김, 『기준 없이』 36P,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