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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시학

DD ·2026.03 

    

1) (머무름)을 모르는 자들

 

 오늘날, 빅테크 기업이 계시하는 미래는 곧 세계의 진실로 인식된다. 그들에게 하달받은 미래는 도래할 현재인 동시에 이미 도착한 현재가 되며 우리는 확정적으로 기술이 계시하는 미래에 통합된다. 방향이 고정된 세계는 오직 시간만을 문제시하며 해당 세계에선 시간을 단축할수록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 속력으로 빚어진 경제적 차이는 노력으로 초월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벽을 생성한다. 절대성은 문제로의 접촉 거부를 유도하며 부정적 감정의 폐쇄적 진동만을 남긴다. 인간의 운동, 즉 물리적 현실화를 무력화하는 속력의 절대적 시스템 앞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기술에 신체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현대인이 AI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자동주행 자동차에 탑승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산성 측면에서 인간의 운동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운동은 인간의 운동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미래를 향해 질주한다. 기술이 운동의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끝내 인간과 자본은 합일에 성공하고 말았다. 예수는 접촉으로의 욕망과 금지라는 서로 다른 벡터의 충돌 속에 신의 그림자를 남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 )”다. 그렇다면 물신(物神)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현대 사회의 진정한 비극은 물신이 인류의 피부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물신은 말한다. “나를 만져라(Tange me).” 물신과의 접촉을 위해 우리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곳으로 향한다.


널 기다리다가, 엄청나게 반질거리는 실크 슬리브리스 원
피스를 사고 말았다 전적으로 네가 늦었기 때문
 헐레벌떡 뛰어온 너의 얼굴에 원피스를 던진다 이런 몰지
각한 행위, 역사적으로 낭만이라 불려온
 이 악랄한 자식아, 이제 난 기차표를 살 수가 없다 약속대
로라면 우린 정시에 만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를 타야 
만 했는데 너 게을렀지, 다음 차를 타면 된다고, 마음대로
생각했지,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나는 순
식간에 가난해지고 말았다 평소 입지도 선망하지도 않는 이 
웃기는 옷을 사버렸다고, 다 끝났다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사치」 부분



 현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면 이제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속력의 폭주를 톺아봐야 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지 못한 이들은 “게을렀”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가난해”진다. “헐레벌떡 뛰어온 너”를 기다리는 화자의 기다림은 “역사적으로 낭만이라 불려”왔다. 시적 상상력의 본질은 멈춰서서 바라보는 일상의 응시에 있지 않던가. 현대인에게 기다림이란 “평소 입지도 선망하지도 않는 이 웃기는 옷”을 입고 “헐벗은 사람이 되”는 “춥고 흉하고 괴상하고 부담스러운 모양새”다. 참을 수 없는 머무름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시를 놔둔 채 저 먼 곳으로 강제 이동한다. 시로부터 너무 멀어진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시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질 않는다.


2) (자신)을 모르는 자들 


 오리 너구리를 아십니까?
 오리 너구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아에게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듯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누에 치던 방을 잠실이
라 부르는 것처럼

 나를 위하여 내가 하는 일은 
 밖과 안을 기우는 것, 몸을 실낱으로 풀어, 헤어지려는 
세계를 엮어,
 붙들고 있는 것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안팎이라고 부르고 

『검은 머리 짐승 사전』, 「작명소가 없는 마을의 밤에」 부분 



이 시를 읽은 그대. 오리 너구리를 상상해보라. 

 시는 기본적으로 인식의 지연을 발생시키는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균열을 포착한다. 오리 너구리는 오리와 너구리란 두 단어에 의해 의미 사이를 표류하는 난민의 특성이 강제된다. 오리 너구리는 오리와 너구리라는 두 개체와 아무 연관 없는 그 자체로 고유한 또 다른 개체다. 그러나 오리와 너구리라는 개념에 내재된 이미지는 오리 너구리의 고유한 이미지를 세계 밖으로 추방한다. 그래서 그들은 추방된 이미지를 대신해 감각의 즉각적 수용, “강의 동쪽을 강동”이라 부르고 “밖과 안을 기우”는 자를 안팎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이미지를 회복한다. 그런데 신이인의 시는 오리 너구리 같은 난민의 이러한 이미지 회복을 불법 행위, 곧 법제화되지 않은 행위로 본다. 불법을 일삼는 그들은 “오리가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나 진짜도 될 수 없었던 봉제인형들”,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못한 실오라기”다. 이 불법적 측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밉다, 미워해, 이런 말은 모서리도 둥글고 또 귀엽게도 
보여서 
 나는 나를 설명할 때 그런 스티커를 자주 썼다

 오래된 스티커를 떼 내면 끈적하고 시커먼 자국
 경멸해

 화장실 타일마다 기분 나쁘게 끼어서
 빡빡 닦아도 안 닦이는 애들
 거기 있으라 하고
 두는 수밖에 없었지

 매번 그런 애들 앞에서 팬티를 내렸다

네가 어디를 제일 부끄러워하는지 
어디를 공들여 씻었는지를 알고 있어

머리카락이 너무 길다고 귀신 취급을 받을 때 많았지만
할 수 없었지 
나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려야 했다

『검은 머리 짐승 사전』, 「검은 머리 짐승」 전문



시 속 화자는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밉다, 미워해” 같은 “스티커”를 사용했다고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스티커”의 제거를 통해 드러난 불쾌의 잔여 앞에서 화자는 “팬티를 내”리는 행위를 수행하며 과거의 사건을 드러낸다. 문제는 과거가 드러나는 행간에 나오는 “네”의 정체다. 「검은 머리 짐승」은 “네”의 대상을 “안 닦이는 애들”과 화자로 중첩하며 의미를 동시적으로 생성한다. 

1) “네”의 대상이 화자 자신일 경우

 이 맥락에서 팬티를 내리는 행위는 무기력하게 좌절된 재현의 실패를 의미한다. 여기서 화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려야 했”던 건 개인의 역사라는 고유한 개별성이다. 그것은 언제나 잔여를 남기는 이미지의 찌꺼기이자 그/그녀를 오리 너구리와 같은 불법 이민자의 층위로 분류시키는 속력 저하 요소다. 그것은 “빡빡 닦아도 안 닦이는 애들”이라 “거기 있으라 하고 두는 수밖에 없”는 “귀신 취급을 받”아도 싼 자를 만든다. 이 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려야”하는, 속력의 절대적 시스템에 의해 배제된 검은 머리-짐승의 역사다.

2) “네”의 대상이 “안 닦이는 애들”일 경우

 이 맥락에서 팬티를 내리는 행위는 자기 스스로 재현의 실패를 재현하며 접속 불가했던 존재자에게 가닿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된다. 속옷을 내리는 행위와 씻는 행위 사이에는 어떠한 사건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이 시는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경계를 유지하며 재현을 거부한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욕망은 배제당한 존재자들을 향한 안전한 형태의 접속을 유도한다. 그뿐만 아니라 욕망을 통해 회복된 상상력은 이 시를 지배하는 부정의 언어를 “둥글고 귀엽게도 보여서”라는 긍정의 맥락과 중첩하여 중성적 성격으로 변모시킨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을 통해 생성된 새로운 시간 속에서 시스템이 계시하는 미래의 근거 와해를 목격한다. 재현의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지 않는 진정한 유희로서의 상상이 차이를 반복하며 동일성의 체계를 무너트린 것이다. 이렇게 재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검은 머리 짐승은 재현의 형식 그 자체를 재현하는 “귀신”이자 “스티커”인 진정한 검은 머리 짐승이 된다. 

 신이인의 시 속 주체들은 허공의 형식을 통해 존재의 역량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허공은 비어있는 시간을 통해 현전하는 ‘모든 대답 위에서 문제와 물음들이 항구적으로 존속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지’1)다. 허공은 자신의 의지 이전에 이미 그렇게 존재한다는 습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일상이란 습관성은 현대 세계의 빠름을 무력화시키는 이미 이곳에 있음이다. 그들은 「폴터가이스트」의 “천천히 들어왔다가 나가는 숨”, 있다는 게 당연해서 습관처럼 접촉되는 “손에 의해 밝혀지는 존재”다. 무언가를 의식하는 법 없이 의미의 빈자리로서 세계 내에 녹아드는 그들은 불법 표류자가 아니라 무법자다. 그들은 법으로부터 버려져 끊임없이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 의미로부터 버려져 끊임없이 빈칸이 된다. 허공은 자기 자신으로 재현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재현의 역량을 강탈한다. 오직 자신만을 모르는 허공은 해당 세계의 척도를 전복하지 않으면서 의미가 도착하기 전의 시간이 된다. “네”의 대상이 화자 자신인 세계와 “네”의 대상이 “안 닦이는 애들”인 세계 모두 애초부터 이곳에 있다. 다만, 문제는 현시됨과 현시함 사이에 존재하는 무지, “아, 이상해”를 유발하는 감각이다. 

3) (진실)을 모르는 자들



 영원성과 관계를 맺을 것 같은 진실은 때때로 유행이란 현재성과 맞물려 그 접속의 경로가 뒤바뀐다. 아니, 뒤바뀐다기보다 접히면서 표면화된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우리가 진실이라 생각했던 그 어떤 사실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사료의 단락이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진실은 유행과 역사 사이에서 발생하는 진자 운동, 현재성과 영원성의 중첩을 통해서 드러나는 의미의 미도착이다. 


헌 옷 수거함에서 건져 올린 나
옷걸이 구멍에 목을 집어넣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네
하지만 나는 새 옷이라네 
누구도 한 번을 안 입어 주고 수거함에 처박았을 뿐
믿어 주게 나는 새 옷이라네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었다네
주름을 다려서 펼쳐보면 안 되었다네
주름을 다려서 펼쳐보면 알게 될 걸세
이 원단은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생략)

이리 오너라.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면 돈을 주지. 하지만 돈은 이미 줬으니 나를 기분 좋게
해 주어야 한다
내가
돈을 받았나?
아가씨 칭호를 얻은 내가 사고 싶은 건
고작
중고 원피스였네

『검은 머리 짐승 사전』, 「올드 앤 뉴 트라우마」 부분



“헌 옷 수거함에서 건져 올린 나”라는 문장은 주어와 목적어를 모호하게 만들어 들어 올려진 게 “나”인 동시에 “나”가 언급되지 않은 무언가를 들어 올렸음을 모두 표현한다. 그래서인지“헌 옷 수거함에서 건져 올린” 옷이 “새 옷”이라고, “이 원단은 미래에서 왔다”라는 정보는 화자 자신의 주장처럼 보인다. 이러한 진실의 모호함은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면 돈을 주지. 하지만 돈은 이미 줬으니 나를 기분 좋게 해 주어야 한다.” 같은 행위 사실의 불확실성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흥미로운 건 사건의 당사자인 화자 자신조차 돈을 줬는지, 이것이 어떤 옷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건의 진실이 행위 주체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접근 불가능한 신비로서 세계 뒤편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신이인의 시에서 불가능은 진실로의 무한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불가능의 가능성이란 표지에 가까워 보인다. 

 「올드 앤 뉴 트라우마」는 인간 육체와 결부된 혐오를 인간 인식의 한계 차원으로 재배치한다. 역사는 의미의 존재적 연원이자 파편화된 실재가 잠들어 있는 잠재적 뒷면이다. 반면 유행은 의미의 표지로서 특정 시간을 물성화하여 파편화된 실재를 표면화한다. “헌 옷 수거함에서 건져 올린 나”와 “새 옷”의 관계는 이러한 역사와 유행의 관계성을 가진다. 유행은 일상에 숨어있다가 우연히 표면화되고 인간의 의식은 이를 뒤늦게 미래로서 포착한다. 실제로 화자는 유행을 단순 과거의 유행이 아닌 역사의 연장으로서 차이를 머금은 미래로 받아들인다. 헌 옷이 자신을 구성하는 “이 원단은 미래에서 왔다”라고 주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행은 일상에 숨어있는 대상의 잠재성에서 비롯된다. 유행한 것도 유행할 것도 이미 이곳에 있다. 

 “다시 유행해 줘요. 미래를 돌려주세요.” 같은 욕망에는 현재와 미래의 시간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줌마”와 “할머니”는 표면화되지 못한 유행이자 아직 인식되지 않은 미래로서 “통유리 바깥”에 위치한다. “소리쳐 본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다. 우리가 “나는 당신의 친구”라는 말을 “모멸감”으로 느낄 뿐이다. 신이인의 시는 현실 시스템을 전복하는 낭만성이 아닌, 일상에 잠들어 있는 잠재성과 그로부터 표면화되는 의미에 주목한다. 이때, 의미의 표면화가 기대는 우연성 때문에 화자의 기다림을 수동적이라고 이해해선 안 된다. “할미는 살 만큼 살았으니 모든 것을 이해한다”라고 하지만, “낡지 않은 무엇을 찾아 야금야금 솔기를 씹던 사람들”에게 “죽어”라고 소리치는 걸 보라. 무법자들은 현재의 상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운동한다. 이 끊임없음은 반복에 내재한 차이를 응시할 줄 아는 긍정의 태도가 전제돼야만 가능하다.


박살나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거기서부터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다

별은 둥글고 텁텁하고 못생긴 땅덩어리
빛나지 않지
그게 중요해? 

이 땅덩어리가 부서진다는 진실
그게 중요해?

나는 그리고 만들고 전시하고 
기다리는 사람
무엇을?

다음을 

다각형들을 
실에 매달아

천장에 달고
빙글 빙글
건드리면

쓸모없는 모빌이 당신 눈앞에 있다

얼핏 우주계처럼 불가사의해 보이나

사는 동안 잠시 날 달래줄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꿈의 도형」 부분


 “쓸모없는 모빌”은 “우주계처럼 불가사의해 보”일 때 “유희”의 시발점이 된다. ‘콜린스가 지적했듯 누락이 억압의 한 패턴이라면, 상상력을 통해 역사를 추정하고 다시 쓰는 작업은 누락된 존재의 역사를 복원/창조하는’ 2)예술가의 정치적 놀이가 될 수 있다. “다음”을 “만들고 전시하고 기다리는” 예술가에겐 한계조차 유희가 된다. 그들 손에서 불가능은 절대성이란 통합된 벡터를 상실하고 욕망과 금지라는 서로 다른 벡터를 회복한다. 그래서 무법자들은 혁명하지 않음에도 혁명을 이룩한다. 가장 투명한 게 가장 불투명하다고 외치면서 말이다. 우리는 어떤 미래가 이미 도래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인식되지 못한 미래는 무지라는 인간의 한계로서 상상력을 유발하는 유희의 매개체가 된다. 진실은 “박살나면” 곧장 “거기서부터 다음으로 넘어가는” “못생긴 땅덩어리”다. “불가사의”를 “유희”로 보는 태도는 “박살나면” 재기 불가한 것도 “다음으로 넘어가는” 조건으로 만든다. 

4) (시)를 모르는 자들



1

직사각형 숲 안에 글자가 모여 있었다
이리 와 어서 와
나의 친구 나의 엄마
나의 창조주

글자들끼리는 사이가 좋았다
손을 잡고 몸을 맞추며 말했다
이곳은 무해합니다
테러와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습니다
나의 말이 아니라 글자가 자기들 멋대로 사랑해서 만든 말이었다




그들이 엮는 말들은 내 피부로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내 피부에 어딘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으며 

이것이 알려진다면 경우에 따라
피부를 벗겨내는 치료도 각오해야 할 듯했다


2

신들끼리 모이면 나는 주로 못돼처먹은 편이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글자들을 쓰다듬어
희망하는 건강한 아름다운-과 짝을 만들어주어도 모자
랄 판에
못돼처먹은 
이라는 말을 남겨두고 숲 바깥으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
었다

얘들아, 못돼처먹은을 사랑해줘
못돼처먹은은 변하지 않을 거다
나는 이 아이를 너희와 함께 둘 거야

무해함을 위하여 글자들이 손잡는다
이곳에는 테러와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습니다
그리고 못돼처먹은
그 어떤 것도 

나는 무능한 신으로서 위스키를 조금씩 마시며 
숲속 어딘가에서 연기가 치솟는 정경을 바라보았다


3

긴 세월 동안 여러 번 하늘 색이 바뀌었을 테고
때때로의 검은 구름만큼은 여전한

저 숲에 이제는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싯적 믿었던 희망과 건강과 아름다움은 여전히
저 안에서 살고 있다


많은 나뭇가지를 안아봤고
그러다가 꺾기도 했을 것이고

나는 나무에 있는 가시들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
몸 곳곳에서 만나 번식을 하고 세상을 꾸리고 
나를 친구, 엄마, 창조주라 부르는 일을

내 피부 안쪽을
여지껏 곱고 고요하게 
전쟁터로 일구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숲을 위해서다

4

이따금 글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그들이 말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종이에 나열하고 고민한다

못돼처먹은 친구
못돼처먹은 선생
못돼처먹은 감수성
못돼처먹은 과거의 사랑
못돼처먹은 무
못돼처먹은 해
못돼처먹은 기생충
죽지 말고 살았으면

너희들의 왕국에서 영원히
못돼처먹은 시인들
못돼처먹은 시인
못돼처먹은 시
못돼처먹은 신

나를 위해서다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 「꿈동산」 전문



 “못돼처먹은”에 저항하기 위해 손을 잡는 순간, “못돼처먹은”은 “그 어떤 것도”와 함께 그대로 자취를 감춘다. 혹자는 앞 행의 서술어인 “없습니다”를 생략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관습을 통해 예측된 결과이지 시가 실제로 말한 바가 아니다. 역사를 통해 도출된 서술어 “없습니다”가 시의 여백을 차지하는 순간, “못돼처먹은 그 어떤 것”은 즉각적으로 “글자가 자기들 멋대로 사랑해서 만든 말”이 된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무능한 신”을 자처한다. 자신이 숲속에 “못돼처먹은”이란 말을 놔둔 채 바라보는 일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무능과 관련된 태도는 「낙원 없이」에서 보충적으로 드러난다. 「낙원 없이」에서 「꿈동산」은 “못돼처먹은 시인 녀석”을 “외계인이라고 바꿔놓고 세계 밖으로 추방”한다. 화자는 이에 저항하지 않고 “털테털레 외계인이란 이름을 들고 우주 정류장”으로 떠난다. 신이인의 시는 자신조차 무법자로 만들어 스스로 유행과 역사의 긴장 관계 안에 진입한다. “시인”은 자신이 쓴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언어를 좌우할 수 없는 무능력, 시인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무지’3)의 상태에 빠져있다. 그래서 “시인”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인지 봐야”할, “되돌아오는 꿈만큼 아늑하지 않을 게 분명.”(「낙원 없이」)한 그것을. 

 「꿈동산」의 화자는 “무해”가 “내 피부로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며 “피부를 벗겨내는 치료도 각오”한다. 이때, 화자가 느끼는 무감각증은 자명하게 문제적이다. 화자의 피부 안쪽은 “고요한 전쟁터”다. 고요와 전쟁은 서로 다른 감각을 요구하며 이는 피부 바깥의 대상과 피부 내의 주체를 비-동시성의 세계로 이끈다. 즉, 피부를 경계로 현재가 분열된다. 이 시의 핵심은 “무해”와 “못돼처먹은” 간의 진실이 아닌 ‘봄’의 동시적 비-동시성에 있다. 화자의 피부에는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가시화된 무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무감각이 왜 문제인지 모르는 비가시화된 무지다. 현시함과 현시됨은 서로의 몸을 강탈한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눈이 떠진다. 

 「꿈동산」에 숲 바깥은 없다. 이 숲은 “무해”와 “못돼처먹은”이 서로의 형상을 반복해서 강탈하는 “어떻게 해도 지나갈 수 없는 숲”(「어린 사랑의 시」)이다. 화자는 숲 바깥으로 도망쳤지만, 어느새 “숲속 어딘가에서 연기가 치솟는 정경을 바라”본다. “무해”를 느끼고 싶지만 자기도 모르게 “못돼처먹은”을 느낀다. 무감각은 “무해”와 “못돼처먹은”이 동시에 감각되는 상태다. 서로 다른 벡터의 충돌은 “구불구불한 꼬챙이에 꿰여 정해진 길”(「낙원 없이」)을 만들며, 둘 다 존재하고 있음을 표면화한다. 신이인의 시는 서로 다른 존재의 파동이 그리는 무용을 쫓는다. 그녀의 시는 “못돼처먹은”이라는 말을 남겨두고 숲 바깥으로 달아나버린다. 달아나는 시와 달아나는 시를 쫓는 자 사이의 일정한 거리가 시가 존재할 수 있는 머무름의 공간을 마련한다. 무지의 “왕국에서 영원히 못돼처먹은 시인들 못돼처먹은 시인 못돼처먹은 시 못돼처먹은 신”은 자기 자신을 쫓는다. 


5) (모르는 것)을 모르는 자들



 「낙원 없이」의 “시인”은 무언가를 기다려서 남는 게 아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기에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대상을 모르는 기다림이란 순수한 운동성만을 가진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행위만 반복하는 “시인”은 “사랑했던 쓰레기”와 함께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는다. “시인”은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해 “외계인”이 된 게 아니다.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기에 세계와 분리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시인”은 “우주 정류장”에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시가 아는 세계”와 “지구”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기다림을 통한 머무름 속에서 시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로부터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평론가들에게 시인이 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시를 몰랐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시에, “가장 사랑했던 쓰레기”(「낙원 없이」)에 올라타지 말고 멈춰서서 기다리라고. 그 말을 듣더니 평론가가 말하더라. “방이 좁고 힘겨워져 더 견딜 수 없겠다고 판단했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걸어나가니 세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주처럼 컸다. 그리고 미친 것처럼 밝았다. 어둠은 없었고 나는 두 번 다시 빛나지 않았다.”(「기어코 난」). 

  세계가 자아내는 속력과 그로부터 비롯된 시간의 강도는 우리의 몸을 세계로부터 나가떨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나가떨어진 것이 정녕 우리인가? 그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기다림은 신학적 맥락에서 말하는 계시의 믿음이 아니다. 여기서의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가 곧 삶의 궤적이 되는 세계를 향한 무지의 긍정이다. 현재와 미래의 미끄러짐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관절의 삐그덕거림이 시의 입을 연다. 사진이 시간의 미라 콤플렉스라면 시는 시간의 좀비 콤플렉스다.



NOTES
  1. 각주

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256p, 민음사
2) 루인, 「캠프 트랜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의 역사 추적하기」, 248P, 한국문화연구학회
3) 자크 랑시에르, 『미학적 무의식』, 35p, 현실 문화

* 이것은  신이인론이 아니다.